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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리얼리즘 위에 써내려간 시정은 흐르고
2001-02-02

충무로작가열전 3 김지헌(1930∼)

사흘간의 귀휴를 얻은 모범수 여인이 경찰에 쫓기고 있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함께 멀리 도망가자고 졸라대지만 여인은 끝내 교도소로 돌아간다. 여인은 출옥 이후 청년과의 약속장소에서 그를 기다리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여인이 교도소로 돌아간 직후 청년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는 여인의 뒷모습 위로 만추의 낙엽들만이 휘날린다. 한국영화사의 전설 <만추>의 매혹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오리지널인 이만희의 <만추>는 프린트는 물론 네가필름까지 소실되어 그야말로 전설 속에 묻혀버렸지만, 이후 김기영과 김수용이 각각 <육체의 약속>과 <만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으며, 특히 후자는 비디오로도 출시되어 있으니 당장에라도 구해볼 수 있다. 나는 김수용의 <만추>를 극장에서 보았는데 김혜자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흩날리던 낙엽들을 바라보며 가슴 먹먹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의 기록을 들춰보면 이만희의 <만추>가 던진 파장이 실로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외국영화에 비해 한국영화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이른바 고급관객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여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일본에 수출한 최초의 한국영화였으며,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되어 현지언론의 격찬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여 그해의 영화베스트5에 들었다고 하니, 당시의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에 견줄 만하다”며 한껏 치켜세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추>는 분명 한국영화가 발견한 새로운 영상언어의 신개지였다. 이전까지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훌쩍 뛰어넘어, 빛과 소리로 만들어내는 이미지 자체를 중시하며, 극히 절제된 시적 대사만으로 인간실존의 본질을 포착해낸 솜씨는 분명 눈부시게 새롭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 한국영화의 새 영토를 개척해낸 영상시인이 김지헌이다.

평안남도 진남포 태생인 김지헌은 해방 이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영화예술에 눈을 떴다. 당시 그는 명동 건너편에 있던 국립도서관에서 프랑스영화의 시나리오들을 탐독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덕분에 1930년대 프랑스영화의 시적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샤를르 스파크나 자크 프레베르 같은 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김지헌은 1956년 미당 서정주의 격찬에 가까운 추천사를 받으며 <현대문학>에 시인으로 데뷔한 다음 이태 뒤인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한다. 수업 시절과 출발점이 이러하다보니 이 시인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가 이후 유럽 예술영화의 시적리얼리즘을 국내에 토착화시키면서 시정(詩情) 가득한 작품들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켰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초기의 수작 <젊은 표정>이 한국적 누벨바그의 신호탄처럼 인식되었을 정도이니, 그가 당시 얼마나 새롭고 진보적인 작가였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김지헌은 데뷔작인 <자유결혼> 이후 현재까지 10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써왔고 그중 영화화된 것만도 70편에 육박한다. 그와 많은 작품을 함께한 감독으로는 유현목과 김수용 그리고 이만희를 꼽을 수 있으니, 그의 필모그래피가 곧 한국영화사의 중심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화된 시나리오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을 포함한 제반여건상 제작이 보류될 수밖에 없었던 미발표작품들에 대해서 좀더 큰 애착을 표현하곤 한다. 집문당에서 출간한 두권짜리 <김지헌 시나리오선집>(1997)에는 그가 아끼는 미발표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히 레제시나리오라고 놓고 보아도 그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시적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작품들이니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김지헌의 존재는 이 척박한 충무로의 풍토에서 볼 때 하나의 축복이다. 20세기폭스의 한국지사장을 거쳐 최근 시네마서비스에 합류한 김정상이 그의 아들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8년 이병일의 <자유결혼>

59년 박구의 <인생극장>

59년 유현목의 <구름은 흘러가도>

60년 이성구의 <젊은 표정> ★

61년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 밑>

63년 정진우의 <외아들>

64년 박종호의 <학사주점>

64년 김묵의 <용서받기 싫다>

66년 유현목의 <태양은 다시 뜬다>

66년 이만희의 <만추> ★

67년 유현목의 <종야>

67년 이만희의 <원점>

69년 윤성환의 <잔혹한 청춘>

73년 김기덕의 <씻김불>

75년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

77년 문여송의 <진짜 진짜 좋아해>

77년 유현목의 <> ★

78년 김수용의 <망명의 늪>

79년 임권택의 <신궁>

81년 김수용의 <만추> ⓥ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