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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유럽에 구현한 남성들의 원더랜드, <800 블렛>
문석 2005-03-22

아직까지 황야에서 떠도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후예들, 스스로의 존재를 선언하다.

텍사스 할리우드. 미국의 어느 지역이 아니다. 이곳은 스페인 남부 알메리아 지방의 사막 한가운데 차려진 영화 세트장으로 숱한 스파게티 웨스턴영화가 촬영된 곳이다. 서부극의 지위만큼이나 쇠락해버린 이곳엔 일군의 사람들이 깃들어 있으니, 한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조지 C. 스콧의 대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는 훌리안(산초 그라시아)을 비롯한 스턴트맨이 그들이다. 여기서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한줌도 안 되는 관광객을 상대로 서부극의 한 장면을 쇼처럼 재연하는 것. 이 한가로운 동네에 훌리안의 손자 카를로스(루이스 카스트로)가 찾아오면서 <800 블렛>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여곡절 끝에 카를로스와 훌리안이 가까워질 무렵, 엄마 라우라(카르멘 마우라)가 아들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다. 역시 스턴트맨이었던 남편이 시아버지 훌리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라우라는 ‘꿩 먹고 알 먹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난항을 겪고 있던 테마파크의 부지로 이곳을 선택해 비즈니스 문제도 해결하고 훌리안에 대한 복수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일할 곳이 없어진 훌리안은 800개의 실탄을 사모아 퇴거를 요구하는 철거반, 경찰 등과 격렬하게 대치한다.

시대착오적이지만 낭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냉정한 현실과 맞서싸운다, 쯤으로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800 블렛>은 21세기판 스파게티 웨스턴을 추구하는 영화다. 현실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스턴트맨들은 정말 서부의 무법자와 같은 구석을 갖고 있다. 마약을 밀매하고, 돈이 생기면 여자와 함께 술을 진탕 마시는 파티를 즐기며, 마을로 들어가선 공포탄을 펑펑 쏴대는 이들은 내일에 대한 미련이 없는 에피큐로스들이다. 이들은 심지어 경찰과 팽팽한 대치를 벌이는 와중에도 스스로 무법자가 된 양 즐거워한다.

“요즘 영화는 강한 맛이 없다”는 훌리안의 대사처럼 <800 블렛>은 원시와 야만이 지배하는 남성들의 원더랜드 ‘서부’를 21세기 유럽에 구현하려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야기는 밋밋하고 대부분 예측 가능하다. 이 영화의 감독이 하위문화와 장르영화를 유쾌하게 뒤틀어낸 <커먼 웰스>와 <액션 뮤탕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실망감은 더욱 증폭된다. 여자는 남자의 길을 이해 못한 채 이를 가로막는 존재이며, 부계의 혈통이 이어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제시될 때는 캐릭터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저 남는 거 하나는 감독의 서부영화에 대한 열렬한 애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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