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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기술의 무서운 힘, <화이트 노이즈>

이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옛말. 망자의 음성까지도 친절히 전달하고 분석해주는 현대 과학기술의 무서운 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더이상 이 세상에, 혹은 그 어느 세상에도 그가 부재한다는 깜깜한 절망감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 어딘가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는 견딜 수 있다. <화이트 노이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그런데 죽은 이의 음성은 산 자의 꿈이나 무당을 통해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괴기한 형상과 목소리로 컴퓨터와 라디오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기록과 녹음을 통해 분석되는 죽은 자의 소식. 그것은 더이상 낭만적이거나 반갑거나 슬프지 않고 다만 소름끼친다.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존(마이클 키튼)은 어느 날부터인가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자동응답기와 라디오를 통해 음성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에 흐릿한 형상으로 나타나 죽음의 위협에 당면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 영화에서 존을 죽은 자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통로는 죽은 자의 음성, 형상을 녹음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EVP(전자음성현상)이다. 라디오, 컴퓨터 등의 주파수, 즉 ‘화이트 노이즈’(음향잡음)를 통해 죽은 자의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도 연구되고 있다는 이 믿을 수 없는 현상을 통해 영화가 주목하는 지점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절박한 소통이 아니다. 영화는 죽음을 예언하는 죽은 자의 메시지와 산 자를 구하려는 존의 활약을 통해 오히려 삶과 죽음 사이에 경계를 만든다. 게다가 죽음의 세계를 천사와 악마의 이분법적 논리로 재현하여 악의 그림자에서 지극히 전형적인 공포를 내세운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도, 악의 존재도 아닌 EVP의 존재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EVP는 마침내 죽은 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원의 통로일까. 초현실적인 상황이 첨단 과학기술의 몸을 빌려 현실화되는 이 아이러니한 과정에는 죽음에 대한 사고가 없다. 죽음을 공포의 초점으로 다루면서도 죽음을 고민하지 않으므로 영화 속 초현실과 현실의 만남은 매끄럽지도, 그렇다고 긴장감이 넘치지도 않는다. 오직 분명한 것은 죽음의 세계를 현실로 귀환시키고 만 문명의 기술에 비한다면 영화가 공포의 초점으로 삼은 모니터 속 죽음의 메시지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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