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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와 생존의 역정, <킹덤 오브 헤븐>
김혜리 2005-05-03

중세 서사 블록버스터의 중심에서 평화 공존을 외치다.

한때 사학과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경건한 마음으로 밑줄을 긋는 첫 경구가 있었으니, 바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정의다. 여기서 역사란 과거의 삶 자체(history)보다 그것에 관한 기록(historiography)을 의미한다. 12세기 십자군전쟁을 복원한 블록버스터 <킹덤 오브 헤븐>은 사극 장르의 ‘역사’ 역시, 과거와 현재의 협상임을 보인다. 작가 윌리엄 모나한은 <킹덤 오브 헤븐>의 시나리오를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할 무렵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무슬림과 서유럽인의 평화공존을 흙발로 짓밟는 주전파 기독교도의 도발, 학살을 관용으로 갚는 술탄, 사막의 전쟁 끝에 화장터로 변해가는 고대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살고 봐야 할 것 아니냐!”고 외치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동시대 관객의 심경은 번잡할 수밖에 없다.

<글래디에이터>(2000)로 할리우드의 5월을 서사극 블록버스터의 좌판으로 바꿔놓은 장본인 리들리 스콧 감독은 십자군 2차 원정과 3차 원정 사이 시대를 살아가던 프랑스의 대장장이 발리안(올랜도 블룸)을 <킹덤 오브 헤븐>의 젊은 영웅으로 골랐다. 병으로 아들을 잃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내마저 자살한 발리앙은 그녀가 지옥에 떨어졌다고 떠벌리는 사제를 살해한다. 그리고 더이상 들리지 않는 신의 음성을 다시 듣고자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발리앙의 생부임을 고백한 이벨린의 영주이자 십자군 용사인 고프리(리암 니슨)는 아들과 동행한 길에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며 발리앙에게 기사 작위를 물려준다. 마침내 도착한 예루살렘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왕 볼드윈 4세(에드워드 노튼)가 평화공존파인 티베리아스(제레미 아이언스)의 보필을 받아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나병에 걸린 왕의 쇠약을 틈타 주전파인 기 드 뤼시냥과 전쟁광 레이놀드(브렌단 글리슨)는 전쟁을 도발하려 한다. 기 드 뤼시엥과 정략결혼한 시빌라 공주(에바 그린)와 사랑이 싹튼 발리앙은 상속받은 영지로 귀환해 오직 살기 좋은 땅을 가꾸려 한다. 임종을 맞은 왕은 발리안에게 공주와 결혼해 주전파를 숙청하고 전쟁을 막아주길 청하지만 도덕률을 중시하는 발리앙은 거절한다. 드디어 왕관을 쓴 기 드 뤼시엥의 개전으로 사막은 피로 물들고 예루살렘에 남은 발리앙은 술탄의 협상제의를 끌어낼 때까지 농성하기 위해 지략과 용기를 짜낸다. 1187년의 일이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 발리안의 여정은 정복이나 성장, 팽창의 길이 아니라 속죄와 생존의 역정이다. 감독의 전작 <블랙 호크 다운>에서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헬리콥터에서 추락한 어린 병사로 나왔던 올랜도 블룸은 <글래디에이터>의 대장군 러셀 크로와 다른 소극적 영웅이다. 또한 <킹덤 오브 헤븐>은 어쩌다 발목을 빠뜨린 사지(死地)에서 희생을 최소화하며 오직 살아 나가는 것이 싸움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글래디에이터>보다 <블랙 호크 다운>과 닮았다. 게다가 발리안에게는 피끓는 원한도 완수해야 할 복수도 없다. 전사라기보다 의로운 시민계급- 대장장이- 에 가까운 그는, 선이냐 악이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악을 선택해야 하는가가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킹덤 오브 헤븐>의 영웅은 천상이 아니라 지상의 왕국에 대해서만 웅변한다). 모든 점을 고려할 때 <글래디에이터>보다 극적 파괴력이 약하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를 만든 자신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데이비드 린 감독을 염두에 두고 <킹덤 오브 헤븐>을 만든 것처럼 보인다. 발리안은 항복으로 인한 명예훼손을 최악의 사태로 생각지 않고, 모스크도 예수의 무덤도 통곡의 벽도 모두 귀한 예루살렘의 유산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상한 기사다. 모나한의 각본은 은근히, 그를 로렌스처럼 역사의 한순간을 우연히 거든 괴짜로 바라보려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자기 할 바만 완수하고 적의 공습이 눈앞인데 “난, 그럼 이만”이라며 사이프러스로 떠나가는 티베리아스(제레미 아이언스)의 캐릭터도 시대극치고 별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무성의하게 빚어진 악역의 성격은 드라마의 탄력을 떨어뜨렸다.

<글래디에이터>는 완벽한 영웅, 완벽한 악당, 완벽하게 억울한 상황을 빈틈없이 조립한 레고 블록 같은 영화였다. 공주와의 로맨스, 다윗 대 골리앗 식의 전투 등 <킹덤 오브 헤븐>도 갖출 건 다 갖췄다. 그러나 각 요소에 기울인 애정과 공력은 강약이 확실하다. 예컨대 공주와 발리안의 사랑은 물 위에 배 지나간 자국처럼 별반 남는 인상이 없는 반면, 전략과 진법까지 관객과 공유하는 전투 액션 연출은 감독의 이름값을 한다. 스콧은 과유불급의 원칙에 충실하다. 불필요한 잔혹 묘사도 거의 없고 심지어 규모상으로는 최대였을, 기 드 뤼시엥과 살라딘의 전투는 편집의 결과인지 통째로 사라졌다. 대신 병사들에게 성큼 다가가 촬영 속도와 칼 울음소리로 악센트를 넣은 백병전의 표현, 유혈의 아수라장이 그대로 성벽과 시체의 잔해 더미로 화하는 공중숏은 카메라 뒤 ‘화가의 눈’을 느끼게 한다.

리들리 스콧은 <킹덤 오브 헤븐>을 위해 그가 즐겨 찾는 모로코의 에사우리아 요새를 이용했고 무하메드 6세의 허락을 받아 1500명의 모로코 군인까지 엑스트라로 동원했다. 스페인 세비야의 무어 건축과 중세의 성도 무대가 됐지만 높이 56피트와 1200피트의 성벽은 꼼짝없이 새로 지어야 했다고. <킹덤 오브 헤븐>의 제작비는 1억4천만달러. 편집하는 쓰린 속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연작은 편집실에서 제 살 깎는 아픔에 몸부림치는 서사극 블록버스터 감독들에게 확실히 새 전투의 벌판을 열어준 모양이다. 리들리 스콧도 3시간40분 길이로 완성한 <킹덤 오브 헤븐>을 미련없이 2시간20분가량으로 잘라 극장판을 만들고, DVD 확장판을 기약했다.

초기 십자군 원정의 역사

성지를 둘러싼 약탈과 학살의 시간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묘지뿐 아니라 ‘통곡의 벽’과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전설을 품은 성스러운 도시다. 서기 638년부터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슬람 교도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방문을 허용했다. 1095년 시작된 기독교도의 십자군원정은 “야만인들의 광포함이 동방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유린했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빼앗아 노예상태로 전락시켰다”는 교황 우르반 2세의 호소로 시작됐다. 귀족뿐 아니라 수천의 백성이 부름에 응했다. 훗날 귀족들의 스포츠로 전락하기 전 십자군 원정의 성격은 본디 성지순례였고 참회로 죄를 탕감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교회는 원정의 참가자들에게 세속의 채무와 의무를 일시적으로 면해주기도 했다. 전 재산을 여행경비로 털어넣고 천국의 열쇠를 얻기 위해 떠난 대대적인 이동에서 후세 역사가들은 일종의 사회혁명적 성격을 보기도 했다.

기독교도들은, 사도들의 묘지가 있고 그리스도의 행적이 있는 땅을 공격하는 것은 옛 소유지를 탈환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상자도 많았지만 어차피 중세의 삶은 잔인했고 약탈도 흔한 일이었다. 원정 과정에서 귀족계급과 하층 전사들 사이의 유대감과 공동체의식이 형성되기도 했다.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십자군은 2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무슬림을 학살했다. “무릎까지 차오는 사라센인의 피 속을 날뛰었다.”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왕위에 오른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성묘 수호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영화 속 왕 볼드윈은 그의 후계자다. <킹덤 오브 헤븐>은 2차 원정 뒤 35년이 지난 1185년부터 1187년 술탄의 예루살렘 탈환까지를 그린다.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은 실존인물로 살라흐 앗 딘(유럽인의 귀에 들린 대로 살라딘이라고 불린다)에게 항전했다고 전해진다. 소설 <술탄 살라딘>의 작가 타리크 알리는 이때 술탄이 발리앙에게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당신네 예언자 예수와 같은 힘이 없어 죽은 자는 살릴 수가 없소. 하지만 포로로 잡은 기사들은 다시 우리에게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석방할 거요”라고 말했다고 소설 속에서 묘사했다. 예루살렘을 잃은 충격은 교황 우르바누스 3세를 급사하게 했다.

(참고자료: <중세의 빛과 그림자> <술탄 살라딘> <기사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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