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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남극일기>

사막 같은 눈과 얼음의 세계에서 서서히 증발해가는 6인 탐험대.

크리스마스를 자축하며 도달불능점의 정복 의지를 다지는 6인 탐험대의 애틋한 분위기에 미스터리의 그림자를 처음 드리우는 건 내부로부터다. 그들 옆, 눈으로 채운 용기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카메라가 그 내부를 투시한다. 끓고 있는 건 얼음덩어리라기보다 섬뜩하게 꿈틀거리는 무엇이다. 첫 번째 암시다. 겉은 차분하고 단단하지만 속은 정복의 욕망으로 끓고 있는 탐험대의 내부에서 뿌리를 키우다가 터져나오고야 말 그 무엇을 은유하는. 문제는 그 정복욕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끔찍한 현실로 귀환할 것이냐에 있다.

<남극일기>는 미스터리 드라마이지만 무보급 행군으로 남극의 도달불능점에 이르려는 지난한 탐험의 형식을 취한다. 우리도 탐험의 끝에 귀환하는 모종의 실체와 마주하기까지 몇 가지 의혹의 관문 혹은 장애물을 거쳐야 한다. 첫 번째 크레바스는 크레바스 자체다. 빙하 유동의 속도 차이로 생긴 균열을 가리키는 크레바스는 눈에 덮여 가려진 경우가 많아 대원들을 기습적으로 삼켜버릴 수 있는 위험한 함정이다. 탐험대를 덮치는 위기의 동력이 안팎에 놓여 있음을 까놓고 드러내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크레바스의 두 번째 습격에서다. 남극을 독립된 캐릭터로 가시화하는 것도 이 크레바스다. 크레바스는 무형의 지형지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존재다. 거대한 아가리를 숨겼다가 불시에 쩍 벌리기도 하지만 이따금 탐험대 주변에 아주 조그맣게 구멍을 내어 그들을 염탐하고 유혹한다.

두 번째 크레바스는 탐험대를 지켜보는 제3의 시선이다.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나타나 탐험대를 지켜보곤 하는 이 시선은 당연히 불길하다. 대원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이 고조될수록 이 시선의 주체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세 번째 크레바스는 최도형 대장(송강호)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호러의 기운이다. 불분명하지만 형체가 있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끔찍한 계기를 제공한다. 이 호러의 기운은 불투명하지만 노골적으로 등장하며 여러 ‘크레바스’ 중에서 자기 기원을 가장 분명히 한다. 네 번째 크레바스는 80여년 전 같은 행로를 거쳐간 영국 탐험대의 ‘남극일기’다. 탐험대가 우연히 그 일기를 발견한 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사건들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일기의 흔적과 닮았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영국 탐험대의 잔재는 일기와 함께 예언적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는 관객에게는 최대의 크레바스로 작동할 것이다.

다섯 번째 크레바스는 모호함이다. 오해는 말자. 여기서 모호함은 결핍의 결과라기보다 직조된, 유형의 존재다. 예컨대 제3의 시선이 호러적 기운에서 나오는 것인지 남극의 눈인지 모호하다.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앞서 열거한 모든 크레바스들은 병렬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러와서는 대원들 내부로 침투하고 그 내부에서 더욱 큰 동력을 얻는다. 그래서 단 하나의 일관된 원인으로 모든 사태를, 모든 가시적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김민재(유지태)가 던지는 “사람의 눈으로 본 건 다 믿을 수 있는 건가요?”라는 의문은 아주 기초적이고 즉자적인 자문자답이다. 물론 그 모호함은 강력하고 공포스런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을 불러오는 주문은 최도형 대장에게서 나온다. “남극을 이길 수 있다면 앞으로 어떤 기적도 만들 수 있다”는 주문. 그가 왜 이런 욕망을 갖게 됐는지는 모호하지 않다.

남극은 인간의 어떤 오물도, 미세한 바이러스도 허용하지 않는 깨끗하고 투명한 세계다. 동시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눈과 얼음의 거대한 공간이다. 6개월간 낮이 지속될 때 그곳에서 보이는 건 흰 지평선과 눈부신 태양뿐. <남극일기>는 그런 곳에 갇혀 미쳐가는 탐험대의 이야기다. 그렇게 넓은 공간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공간에서 미쳐가는 인간을 포착하려는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남극일기>는 한국영화의 희귀한 기록이다. <샤이닝>에서 작가를 미치게 만드는 건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캐릭터였고, <백경>에서 선장을 미치게 만드는 건 바다라는 드넓은 공간이었으나 그건 눈에 보이는 상대와의 싸움이자 거무칙칙한 바다와의 대결이었다. <남극일기>는 그 공간의 캐릭터를 새롭게 확장하려는 코스모폴리탄적 도전이다.

부대장 역 박희순 인터뷰

“남극 보다 인간 내면적 욕구에 주목하는 게 좋았다”

뉴질랜드의 설원에서 촬영했으나 남극이라 믿을 만한 풍경, 낮게 깔리는 음성에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송강호의 광기 등은 <남극일기>를 대표하는 기대치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가와이 겐지가 들려주는 음악은 <남극일기>의 표정이라 해도 손색없을 색깔로 울려퍼지며, 탐험대 부대장 이영민 역의 박희순은 작은 말투와 표정만으로 미스터리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빼어난 역할을 해낸다. 받고나면 더 반가운 예고없는 선물인 셈이다.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했는가. 시나리오와 다른 게 있다면.

=시력이 아주 나쁜 걸로 나오는데 원래 시력이 안 좋아서 내 도수에 맞게 안경을 쓰는 것으로 설정했고, 조금 개인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고 조용조용하게 움직이는 인물로 설정했다.

-그런데 영화 전반부에선 대원들 가운데 가장 의문스럽고 위험해 보이는 인물이다.

=전문가인데 공포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듯한 인물이어서 연기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자연스러움보다는 풀어져 있는 속에서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컨대 “라이터 돌이 빠졌는데” 같은 간단한 대사도 음산하게 하려고 했고, 카세트 스위치를 끄는 것도 쉽게 할 수 있지만 차갑고 냉정하게 하려고 했다.

-감독과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배우들끼리의 연기톤, 특히 (송)강호 형의 톤에 앙상블을 맞추려고 했다. 한해두해 찍어보면서 연기톤을 맞추며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이건 감독의 요구이기도 했다. 감독은 굉장히 쿨한 연기를 요구했다.

-사건의 원인을 풀어가고 보여주는 방식이 특이한데 배우로서 어떻게 느꼈나.

=처음에는 조금 적응을 못한 게, 발산하는 걸 자제시키고 평범한 연기조차 감정을 자제시켜서 다들 초반에 고생이 많았다. 똑같은 대사라도 더 죽여달라, 더 절제해달라고 해서.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인간 특히 남자의 심리가 많이 나오는데 광활한 남극 풍경보다 인간 내면적 욕구에 주목하는 것이 좋았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 중에서 이번에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다면 언짢은 이야기일까.

=너무 고마운 이야기지. 가면 갈수록 새 작품에서 그런 평가가 나온다는 게. 1년을 기다렸다가 1년을 찍은 영화라 각별한데 기술시사 때 보고 실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자기 위주로 보게 되는데 내가 이렇게 못했나 싶었다. 기술시사라 화면이 어둡고 잘 안 들리고 그랬다. 전주영화제 때 색보정, 사운드 등이 많이 보강돼 볼 만한 영화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때는 영화 전체를 보게 되니까. 어제(기자시사회 때)는 담담하게 즐기면서 봤다. 좋게들 봐줘서 기쁘다.

-다음 계획은.

=6월에 <여자, 정혜>의 이윤기 감독과 함께 <러브 토크> 촬영에 들어간다. LA를 배경으로 외로운 사람들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다. 배종옥씨 등과 출연하는데 남자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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