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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50] - 로드무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2000-04-11

이제하 원작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찍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제하씨의 단편소설이다. 이상문학상을 탄 작품으로, 심사를 맡았던 고려대 불문과 김화영 교수가 영화로 만들어보라고 추천해주었다. 이제하씨의 소설은 난해하지만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그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나에게는 유리했다. 그래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읽자마자 한편의 추상화를 마음속에 받아들였고 거기에 감수성으로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이며 복합적인 테마를 부여했다. 시나리오 작업 전에 이제하씨와 김화영 교수와 함께 서해를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역시 이제하씨는 소설에서 분명하게 현실을 밝히는 쪽이 아니라 비현실의 이미지로 또다른 현실을 그려내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가장 진실한 현실의 일면이라고 확신하는 작가였다. 머리가 엄청나게 큰 이제하씨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작업실에서 영적인 세계와 교류하는 그런 작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디킨스가 끝내지 못한 그의 미완성의 소설을 뒤에 누군가 자동기술로 완성했다는 얘기처럼 이제하씨는 그의 창작 작업을 신비한 영적 이미지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바로 그 대표적 예라고 나 혼자 믿어버렸다.

현실과 몽환 사이에서 그의 추상적인 세계가 손 안에 꼭 잡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세계를 더 좋아해서 영화를 촬영하는 데 즉흥적이고 직감에 의존하는 나의 방식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바보선언> 이후 연출자 혼자만의 생각으로 영상을 만들어내는 카리스마의 또다른 쾌감이 불끈 솟아나는 그런 현장이었다. 나는 늘 사모해왔다는 표현이 적절한 그런 심정으로 붉은 황토빛의 모노크롬의 영화 한편을 그려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로드무비 촬영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파트너로 배우 김명곤과 이보희가 아주 적임자였다. 이제하씨는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영화 주제가로 사용하라고 제의했고 무반주로 김명곤에게 주제가를 부르게 했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황량한 무반주 주제가를 나그네의 마음속에 한 줄기 피어올리던 겨울 어느 날 드디어 강원도 일대에 눈이 펑펑 쏟아진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촬영을 떠났다. 청평에서, 옥천으로, 양평으로, 홍천으로, 인제로, 미시령으로, 고성으로, 속초로 그러나 미리 헌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촬영반 모두와 함께 무작정 여행을 떠나 마음에 드는 촬영 장소를 그때그때 선택했다. 이렇게 영화를 만드는 방법은 마치 <바보선언>처럼 지극히 아마추어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지방업자들에게 꼭 이 영화를 권하지 않겠다는 배짱이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번 돈을 조금 쓰면 된다는 그런 배짱이었다. 그래서 적은 제작비의 전략으로 영화를 만들어야만 되었다. 김명곤과 이보희가 희생적으로 1/3도 안 되는 그런 출연료를 받아들였고 나도 연출료를 포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린 것은 생각지도 못한 후반 작업이었다. 세피아의 모노크롬으로 화면을 만들기 위해 필터를 사용했지만 영화진흥공사 현상실에서는 어쩐 일인지 모노크롬 필터의 기능을 오히려 제거해버리는 그런 엉뚱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프린트에서 황토빛 모노크롬의 분위기를 진하게 살리면 사운드트랙에 문제가 생기고 사운드를 살리면 모노크롬에 문제가 생기는 정말 짜증나는 후반 작업이 지속되자 나는 일본에서 프린트를 따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고 제작비에 비해 엄청난 돈을 프린트 작업에 투입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그들의 프린트가 한국의 기술과는 현저한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한국에선 그 당시 자동으로 색보정을 하는 것이 무슨 큰 선진기술처럼 그외 것은 생각지도 않을 때였다. 그러나 도에이 현상팀은 내가 어떤 컬러를 원하는지 알기 위해 시사실에서 자기네가 준비한 각종 샘플을 한 시간가량 영사해 가장 근접된 의사를 알아냈다. 그뒤 자기들만의 회의를 따로 끝마치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상태로 내가 원하는 컬러를 얻기 위해선 수동적인 색보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사용하던 방식으로 숏마다 6프레임씩 피스를 N.G에서 찾아 피스 밴드를 만들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내가 신필림에서 연출부로 일한 시절에나 현상실에서 사용하던 아주 낡은 방식이었다. 네거티브 편집에서 숏마다 사용되지 않는 제일 앞부분이나 제일 뒷부분의 6프레임을 잘라 프린트 현상시의 색보정을 위한 샘플 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도에이 현상소는 연구하는 자세로 그렇게 성실하게, 그리고 최대의 친절로, 최선을 다해, 내가 원하는 컬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때 이렇게 일본에 돈을 많이 주고 만든 영화는 일본에서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바로 제2회 도쿄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방법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때마침 정진우 감독이 길을 터주었다. 도에이의 국제부에서 영화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고 어렵지 않게 본선에 진출했다. 나는 국제영화제에 영화감독으로 필름을 보낸 적은 몇번 있었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 직접 영화제에 참가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 내 과문으로는 어떤 영화제이고 로비 없이는 수상하기 어렵다는 게 상식이었다. 나는 다시 제작비에 비해 정도가 지나친 비용을 로비자금으로 준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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