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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속에 담겨진 은밀한 연애이야기, <인터뷰>
이유란 2000-03-28

‘카메라 속에 담겨진 은밀한 연애이야기’라는 홍보카피를 달고 있지만 <인터뷰>는 숱한 사랑이야기를 빌려 카메라의 진실, 나아가 진실 그 자체를 궁리하는 영화다. 마치 좋은 연애소설이 끝내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성찰에 가 닿듯, <인터뷰>의 로맨스는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건 어쩌면 진실과 거짓를 구분하는 ‘경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혹은 경계짓기의 무의미함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인터뷰>의 화두는 대중영화의 코드에 쉽게 접속될 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낯설고 생경한 영화 컨셉을 주류의 울타리 내에서 풀어내고 있다.

<인터뷰>에는 대부분의 장면이 두번 반복된다. 우선 전반 15분 동안 대략의 줄거리를 잡아줄 장면들이 영화감독인 은석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리고는 ‘인터뷰 1년 전 프랑스 파리’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의 서두보다 더 이전 시간으로 거슬러올라가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뒷이야기와 앞이야기를 꼼꼼히 맞추어야 영화의 모양새가 온전하게 드러난다. 흥미로운 건 이야기 짜맞추기의 묘미가 아니라 같은 장면이 앞과 뒷이야기에서 아주 다른 맥락에 놓인다는 점이다. 전반부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어요. 둘은 춤을 춰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그런 춤을 춰요”라는 영희의 고백은 몽상에 젖은 ‘미용사의 꿈’이지만, 후에 다시 반복될 때에는 그것이 상실한 사랑에 대한 ‘발레리나’ 영희의 뼈아픈 추억임이 드러난다. 진실이란 맥락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한 환기다.

극중 영화감독인 은석이나 관객이 애초에 ‘미용사’ 영희의 이야기를 믿은 건 영희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를 위해 촬영된 인터뷰라는 점이다. 은석은 다큐멘터리와 논픽션과 진실 사이에 등가부호가 놓여 있음을 의심치 않고, 그래서 카메라에 찍힌 영희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영희의 숨은 과거가 드러나면서 은석은 카메라에 찍혀있는 영희의 얘기가 거짓임을 깨닫는다. 이로써 <인터뷰>는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진실성에 의문부호를 찍는다. 인물설정에서부터 <인터뷰>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허문다. 예컨대 권민중은 현실 그대로 ‘영화배우 권민중’으로 인터뷰에 응하지만, 동시에 극중 캐릭터인 영희의 친구이다. 여기에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다. 은석이 파리에서 찍었던 영화에서 여배우가 읊조렸던 대사를 영희의 입에서 다시 들을 때, 극중 현실과 영화는 완전히 겹쳐진다.

<인터뷰>에서는 현실이 픽션보다 더 극적으로 보이는, 뜻밖의 전도가 일어난다. 허구의 인물인 은석과 영희의 사연은 영화에 삽입된 실제인물 20명의 짧은 인터뷰보다 평면적이다. “담배 피우는 여자와의 키스는 재떨이를 빠는 것 같아서 싫다”는 말처럼 인터뷰어들의 얘기는 살아서 펄떡거리는 반면, 영희와 은석은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인물들처럼 숨죽여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들의 얼굴에서 생생한 표정을 지웠다. 심지어 “영희에게 온갖 클리쉐를 다 모아주기”까지 했다. <인터뷰>는 은석과 영희의 은밀한 사랑의 교감을 영화의 기둥줄거리로 세워놓고서도, 관객이 그들의 감정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애써 거리를 두려고 한다. 따지고보면 그들 또한 멜로의 주인공이건만,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시키는 게 <인터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로 인해 관객과의 소통이 방해를 받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감독의 속내인 셈이다.

변혁 감독은 이미 몇편의 단편영화에서 <인터뷰>와 비슷한 고민을 보여줬다. 그는 <ORSON>에서도 실제와 허구의 커플을 뒤섞어봤다. 클레르몽-페랑단편영화제 심사위원장과 비평가 대상을 수상한 <호모 비디오쿠스>로 익히 이름이 알려진 변혁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 영화학과 석사과정과 프랑스국립영화학교(FEMIS)를 마쳤다. 그는 지난 98년 4억원의 저예산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얽힌 네 남녀의 이야기로 <인터뷰>를 구상했지만 애초의 기획은 무산되고 1년 전부터 ‘새로운’ <인터뷰>를 시작했다. 물론, 이 영화가 균열없이 매끄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삼 반복되는 장면들은 영화의 흐름을 늘어지게 할 공산이 충분하다. 1년의 시간 차가 있기는 하지만, 은석이 파리에서 춤추는 영희를 오랫동안 카메라에 담았으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산업적인 시스템망 안에서 새로운 형식 실험을 한계점까지 밀고가려고 한 감독의 시도가 탈색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이제 막 시작하는 감독이다.

변혁 감독 인터뷰

"관객과의 소통문제, 딜레마다"

-2년 전 기획했던 영화와 많이 달라졌다.

=제목만 같다. 제목과 컨셉의 기본은 같지만 <인터뷰>는 상업 영화권에서 만들어졌고, 중심도 다큐멘터리에서 픽션으로 옮겨갔다. 전혀 다른 컨셉이다. 제목을 바꿀까도 생각했다. 그때와 연관을 짓는 게 오히려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영화의 기본 컨셉은 여전히 살아 있는데.

=<인터뷰>에 그런 게 포함되어 있지만 감독이 같은 사람이라서 같은 관심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다른 영화를 만들더라도 일관성은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했으면 좋겠다.

-은석이 영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건 선뜻 납득이 안 된다.

=그건 전혀 다른 컨텍스트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은석은 영희의 춤이야기를 들으면서 파리의 춤 장면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느낌이 있었을 거다. 마지막에 가서 그 여자와 영희를 확연히 동일시하게 되고.

-인터뷰 대상자들에 비해 심은하, 이정재의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그린 건 의도적인 것 같은데.

=맞다. 은석은 왜 픽션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야 하느냐는, 영화학도의 수준에서 고민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영희의 사연이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구태의연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대사에서 욕조 같은 소품까지 일부러 클리쉐를 다 끌어모았다. 6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촌스러움을 동원한 거다. 이 영화에서는 다큐멘터리 인물들이 더 드라마틱하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정의들에 대해 ‘과연 그런가’하고 질문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나눔이라든지, 영화는 첫 장면이 중요하다는 얘기라든지, 타르코프스키의 진실탐구라든지에 대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인 것 같다.

=그렇다. 그래서 썩 재미있게 보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면 사랑이야기로 쉽게 읽을 수도 있다. 이 영화에 여러 겹을 싸고 있었으면 한다.

-첫 영화가 나오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영화에 만족하나.

=점점 변명이 많아지는 것 같다.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아쉬움은 있다.갈 때까지 갔어야 하는 건가 싶은 반면 의사소통하고 싶은 영화인데 더 쉽게 해야 했던가도 싶고. 그 수위 조절하는 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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