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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이 아닌 ‘관계’에 관한 영화, <허리케인 카터>
김혜리 2000-03-14

<허리케인 카터>는 흑백의 링에서 영화의 제1라운드를 연다. 삽시간에 우리의 눈길과 호흡을 휘어잡는 그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 성난 검은 황소, 혹은 뜨거운 맥박이 뛰는 회오리바람. 사각의 정글을 휩쓸고 포효하는 그는 과연 허리케인처럼 광포하며, 그럼으로써 아름답다. 그 폭풍을 삼면의 벽과 쇠창살에 둘러싸인 옹색한 어둠에 가둔다면? 폭풍은 잦아드는 대신 그의 내면에서는 숲을 쓰러뜨리고 해일을 일으키며 울부짖으리라.

첫 눈에도 틀림없다. 이 청년에게 권투는, 하릴없는 분노가 자기 몸을 부서뜨리지 않도록 동력으로 전환하는 발전기 같은 장치다. 백인의 성추행에 맞서다 사춘기를 소년원에 파묻고도 빚이 남아 청춘의 한때를 매장당한 카터는 칼을 갈 듯 육체와 정신을 숫돌에 벼른다. 그를 쫓아다니며 올가미를 거는 인종차별주의자 델라 페스카 형사의 눈에는 모든 흑인은 셋 중 하나다. 범죄를 계획하고 있거나, 현행범이거나, 이미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런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신을 무기로 가공한 카터는 권투 스타가 되어 성공의 깃발을 적들의 코앞에 보란 듯이 펄럭인다. 사치스런 옷을 걸치고 고급차를 몰고, 서슴없이 인종주의를 향한 적의의 잇바디를 드러내면서. 전미 도시에서 흑인인권운동이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던 1967년, 카터에게도 응징이 찾아온다. 그와 존 아티스라는 청년은 3명의 백인을 무도하게 사살했다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3중의 종신형을 받는다. 감옥만은 다시 가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었던 스물아홉살의 카터는 다음 생과 그 다음 생의 자유까지 저당잡힌다.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범죄가 저질러졌소.” 형기 첫날부터 죄수복을 거부한 카터는 90일간 독방 감금으로 수인 생활을 시작한다. 캄캄한 독방에서 카터의 자아는 말 그대로 분열한다. 냉철한 카터와 파괴욕으로 몸부림치는 카터가 드잡이를 벌이는 구석에서, 상처받고 겁에 질린 카터는 눈물 흘린다. 덴젤 워싱턴은 카터의 분노와 자제, 절망을 모두 한 프레임 안에서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자기를 둘러싼 상황을 용인할 수 없는 카터는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환경으로부터 분리해낸다. 교도소 시간표를 거꾸로 살며, 남이 잘 때 깨어 몸을 훈련하고, 법을 공부하고, 자서전을 쓰며 카터는 중얼거린다. 너희는 나를 파괴하지 못해.

<쇼생크 탈출> <도망자> <더블 크라임>이 보여주듯, 누명을 다룬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닥에 팽개쳐진 인간을 다시 일으키는 구원의 정체다. 카터에게 그 힘은 글쓰기다. <쇼생크 탈출>에서 <피가로의 결혼>의 음악이 그랬듯이, 독서와 글쓰기는 그를 교도소 담장 위로 들어올려 멀리 트인 지평을 보게 한다. 카터가 편지 든 병을 바다에 던지는 표류자의 심정으로 쓴 수기 <열여섯 번째 라운드>는 결국 그에게 작은 메시아를 데려다준다. 카터와는 다른 방식으로 차별의 철조망을 기어오르려 하는 흑인 소년 레스라는 총명함과 낙천적 기질로 카터의 희망을 되살리고, 둘 사이를 흐르는 자애와 경애는 <허리케인 카터>를 고립이 아닌 ‘관계’에 관한 영화로 재편한다.

<말콤 X>를 한창 준비하다 “백인 감독은 못한다”는 스파이크 리의 서슬이 시퍼런 일갈에 연출을 포기했던 캐나다 출신 노만 주이슨 감독(74)에게 <허리케인 카터>는 <밤의 열기 속으로> <솔저 스토리>에 이은 인종 문제 3부작 세 번째 영화. 그러나 이 작품에서 노장의 풋워크는 그다지 민첩한 편이 못된다. 배우의 미덕을 살리는 그의 장기는 노쇠하지 않았으나, 영화의 전개는 100% 예측 가능하며, 주연의 걸출함에 반해 조연 캐릭터들의 초상은 매우 엉성하다. <일급살인>의 댄 고든과 <원 프롬 더 하트>의 아르미안 번스타인이 쓴 각본은, 당대 미국 사법 체계의 조직화된 편견을,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사와 판박인 극우 경찰 페스카 개인의 못된 인간성 문제로 축소한다. 그가 왜 숱하게 널린 흑인 시민을 골고루(?) 괴롭히지 않고 카터에게 집착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반면 카터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는 세명의 캐나다 남녀는 비현실적으로 선할 뿐, 체온도 체취도 없다. 교도소 맞은편으로 이사와 전등을 깜박이며 옥중의 카터에게 다정한 인사를 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따뜻한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지만 면책 사유로는 미흡하다.

<허리케인 카터>를 보고 울음이 치받친다면, 누군가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다면, 그것은 덴젤 워싱턴의 공이다. 카터를 전형적인 영웅으로 보려드는 시나리오 안에서도 워싱턴은 투사와 성자, 야성과 절제의 사잇길을 걸으며 관객의 감수성에 몇번의 결정타를 날린다. “답장도 면회도 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나를 약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왜일까. 영화는 증오가 그를 가두고 사랑이 그를 해방시켰다는 교훈을 우리 손에 쥐어주려 하지만, 오히려 자꾸 되살아오는 영상은 절대 고독 안에서 바위가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옥중의 카터는 ‘그들’이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고, 거꾸로 삶 자체를 더욱 세차게 붙들게 된다. 인생은 그처럼 질긴 애착이 없으면 살아내기 힘든 무엇이며, 오직 우리 안에서 발견한 힘만이 우리에게 머무르는 것이다. <허리케인 카터>의 숨겨진 카운터펀치는 거기에 있다.

<허리케인 카터>, 진실과 허구

허구가 감춘 진실, 진실을 침묵한 허구

실화와 역사를 간추린 영화에는 언제나 그들이 시학적인 자유가 허용하는 진실 조작의 선을 넘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눈을 빛내고 기다리던 비공식적인 ‘검열관’들이 따라붙기 마련. 지난해 12월26일 <뉴욕 타임스>에 실린 저널리스트 셀윈 랍의 글 ‘<허리케인 카터>에서 진실과 픽션 가려내기’는 <허리케인 카터>가 진실을 변형한 부분을 신랄히 지적해 관심을 끌었다. 랍의 최대 논점은 가상 인물 델라 페스카가 일단의 실존 형사와 판검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날조와 모략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한 탈정치적 각색, 그리고 캐나다 활동가들이 카터의 석방 과정에 수행한 노릇의 과대평가다. 카터에게 심리적 경제적 조력자였을 뿐 재판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않았던 캐나다인들이 추어올린 반면, 무보수로 헌신하고 마침내 석방을 쟁취한 변호사들은 미미하게 다뤄졌다는 것이다. 또 공범으로 기소돼 15년을 복역한 선량한 청년 존 아티스나 카터의 가족, 친지들이 무시당한 점도 리얼리티를 떨어뜨렸다는 것이 랍의 의견이다. 그런가하면 사건이 있기 전 카터가 흑인들의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옹호한다고 공공연히 천명하고 다니던 ‘선동가’였다는 사실도 영화는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일개 형사의 복수심보다는 뉴저지 백인 지도층의 집단적 경계심이 모함의 뿌리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소년원 복역 외에도 세번의 폭행전과와 사소한 술집 패싸움에 연루됐던 카터를, 술과 도색잡지까지 멀리하는 모범적 인간으로 둔갑시킨 점은, 존경할 만한 인간의 인권만이 보호 대상이라는 편견에 영합하는 듯해 쓴 맛이 남는다. 루빈 허리케인 카터는 석방 뒤 영화 속의 캐나다 3인조 중 하나인 리사와 결혼했다 이혼했으며, 예순두살인 현재 캐나다에서 죄수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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