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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기술에 대한 보고서, <에로스>

부재하고, 유쾌하고, 아련한 세개의 에로스 이야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스티븐 소더버그, 왕가위가 그려내는 에로스에 관한 세개의 화첩.

<에로스>는 세명의 유명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스티븐 소더버그, 왕가위가 각각 에로스라는 주제로 만든 옴니버스영화이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에로스라는 욕망의 주제어보다는 사랑하는 기술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고, 사랑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관찰기이기도 하다. 그들이 정의하는 에로스는 크게 다른 방식으로 엮여 있는 셈이다. 안토니오니는 권태감에 빠진 한 부부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시작하여 철학적 은유의 세계로 마침표를 찍고, 소더버그는 정신상담을 받으로 온 환자와 치료 중에 엉뚱한 짓을 하는 의사를 보여주며 유쾌한 궁금증을 유발해낸다. 반면, 왕가위는 수년간 한 여자만을 보고 사는 어떤 재단사의 연정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 <화양연화>와 <2046>의 어디쯤 끼어 있는 화첩으로 만들었다. 이 각각의 영화는 감독들 특유의 작품세계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장편에서 선보인 일면들을 집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에로스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 소재의 끈에 연연하면서 영화를 볼 필요는 없는 셈이다. 따라서 세편의 영화 <위험한 관계> <꿈속의 여인> <그녀의 손길>을 따로따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극장에서의 상영 순서는 <그녀의 손길> <꿈속의 여인> <위험한 관계>이다).

첫 번째 에로스, <위험한 관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정사> <밤> <일식>으로 이어지는 ‘고독과 소외의 삼부작’으로 이미 유명한 감독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경험의 일부로 인간들 사이에서의 불통을 표현한 바 있고, 그것을 통해 누구보다 지적인 방식으로 모더니즘 영화의 한 계열 안으로 걸어들어간 감독이다. <위험한 관계>는 그 거장이 <구름 저편에> 이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영화 연출에 나선 작품이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될지 모를 이 영화는 여행지에서 무료하게 서로를 대하는 40대 중년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다. 크리스토퍼와 그의 부인 클로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풍광 좋은 곳을 돌아다녀도 그저 싸우는 것이 일이다. 서로의 마음에 상처만 줄 뿐이다. 그러다 부인 클로에는 끝내 크리스토퍼를 떠나 어디론가 가버리고, 크리스토퍼는 전에 봤던 낯선 여자가 머무르는 성에 무작정 찾아가 그녀와 섹스한 뒤 성을 빠져나온다. 시간이 흐르고, 낯선 여자와 크리스토퍼의 부인 클로에는 해변에서 나체로 다시 만난다. 안토니오니는 마치 그와 그녀들 사이의 불통을 그녀들 사이의 소통으로 마무리하려는 것처럼, 벌거벗고 춤추며 마주하는 두 여자의 만남으로 영화를 끝낸다.

<위험한 관계>

<꿈속의 여인>

두 번째 에로스, <꿈속의 여인>. 1955년 뉴욕. 정신상담을 받기 위해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병인은 2주 전에 시작된 꿈이다. 그는 매일매일 같은 꿈을 꾸고 있다. 한 여자가 이제 막 섹스가 끝난 듯 샤워를 하고 옷을 차려입은 뒤 아침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했다가 아내와도 관계가 안 좋아졌다고 투덜거린다. 남자는 긴 의자에 누워 하나씩 이야기한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의사는 창 밖에만 시선을 꽂은 채 다른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 치료 아닌 치료과정의 코미디를 흑백의 화면으로 찍는다. 그러나 그 장면이 끝난 뒤 컬러의 이야기가 다시 한편 이어지는데, 그게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반전의 경험이다.

세 번째 에로스, <그녀의 손길>. 이제 막 재단사의 길로 들어선 샤오 장은 고급 콜걸 후아 부인의 치수를 재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러나 후아 부인은 어떻게 여자를 만져본 적도 없이 옷을 만들겠냐고 묻고는, 잊을 수 없는 첫 ‘손길’을 샤오 장에게 남긴다. 그뒤로 샤오 장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점차 나락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후아 부인과 능숙한 재단사가 되는 샤오 장.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그녀의 손길>의 내용이다. 후아 부인 역의 공리와 샤오 장을 맡은 장첸의 연기가 돋보일 뿐 아니라, 공리는 장만옥과는 다른 품새로, 장첸은 양조위와는 또다른 가냘픔으로 서로의 애정을 자극한다. 영화 속에서 시간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건너뛰지만, 왕가위는 떨어지는 빗방울의 찰나까지 잡아내면서 그들의 감정을 한없이 느리게 정지시킨다.

<꿈속의 여인>

<그녀의 손길>

네 번째 <에로스>. 안토니오니의 <위험한 관계>는 우리가 현자의 돌을 보지 못하거나 그의 영화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소더버그의 <꿈속의 여인>은 야심을 부리지 않았고, 재치있다. 그러나 그만큼 크게 놀랍지는 않다. 만약 세편 중 단 한편만을 고르라면 왕가위의 <그녀의 손길>이 으뜸이다.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의 탄생배경

“안토니오니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참여했다”

모든 시작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였다. 1995년, 안토니오니는 중풍에 시달리면서도 휠체어에 몸을 기대어 <구름 저편에>를 완성했다. 빔 벤더스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그를 대신하여 옆에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어려운 제작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안토니오니의 연출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프로듀서 스티븐 찰 가제프는 언젠가 안토니오니와 함께 “‘에로스’를 주제로 한 삼부작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왕가위와 스티븐 소더버그가 합류하게 된 것이다. 왕가위는 “내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은 나를 비롯한 동세대의 많은 감독들에게 정신적 지주였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대한 존경에서였다”고 말한다.

촬영 역시 안토니오니의 영화 <위험한 관계>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2001년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의 한 호수에서 촬영을 시작한 <위험한 관계>는 약 6주간 이어졌다.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가 그의 저서 <티베르강에서의 볼링: 감독 이야기>에 나온 네개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던 것처럼, 이번 영화 역시 거기에 있던 세개의 이야기를 축으로 엮은 것이다. 게다가 <정사> <밤> <붉은 사막> 등 안토니오니와 수많은 작품을 같이 해온 토니노 구에라가 다시 각본을 맡았다. 소더버그의 <꿈속의 여인>은 2003년 3월 LA에서 크랭크인했고, 왕가위의 <그녀의 손길>은 2003년 말 촬영에 들어갔다. 특히, 왕가위의 영화만들기가 순탄하지 않았다. “사스가 창궐하던 그때 우리는 제작을 시작했다. 원래 촬영지로 결정한 상하이에서의 촬영은 취소됐고 아주 기본적인 스탭만으로 홍콩과 마카오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최대한 촬영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 마지막 이틀은 꼬박 48시간을 쉬지 않고 찍었다. 매일 우리는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손을 씻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으며 의사들의 충고대로 가급적 서로에 대한 신체적 접촉을 피했다. 이런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접촉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게끔 한 것 같다”고 왕가위는 술회한다.

그렇게 완성된 세편 사이의 막간을 연결하는 시퀀스는 토니노 구에라의 시집 일러스트를 맡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로렌조 마토디가 신비로운 화조로 채워넣었다. 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불렀던 브라질 출신 가수 카에타노 벨로소가 음악을 만들어 영화에 넣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근래에 보기 드문 선후배 거장 세명이 한자리에 모인 영화 <에로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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