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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에 포착된 핏빛 과거, <셔터>
이영진 2005-06-28

셔터에 포착된 핏빛 과거. 현실로 삼투된 지독한 악몽. 자국 박스오피스를 호령한 타이산(産) 공포영화가 온다.

타이는 공포영화의 천국이다. 비명이 넘쳐난다. 김지석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옥사이드 팡이 만든 공포영화 제목을 빌려 ‘귀신들린 방콕’이라고 썼을 정도다. 숫자로도 증명된다. 지난해 타이에서 상영된(이월작 포함) 자국영화는 모두 48편. 한국보다 연간 제작편수는 적지만, 이중 호러로 분류되는 영화는 9편이나 되며, 코미디(2004년 기준 16편) 다음으로 대접받고 있다. 여타 장르영화들도 호러 장치들을 심심찮게 혼융한다. 연중 내내 덥고 습한 날씨 탓일까. 영화뿐 아니라 오싹한 광고도 적지 않다. 심지어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 포스터에도 사람 놀라게 하는 이미지가 버젓이 등장한다.

2004년 1억1천만바트를 벌어들이며(30여억원. 현지 물가가 한국의 3분의 1 수준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익이다) 그해 타이영화 흥행 톱을 차지한 <셔터>는 “타이 공포영화는 <셔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후한 평가를 받으며 주목받았던 영화다. 많은 편수의 공포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그럼에도 박스오피스를 뒤흔들 만한 공포영화가 그동안 없었다는 점에서, 더 크게는 <방라잔> <수리요타이> 등 대규모 제작비를 쏟아부은 시대극의 광풍 이후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타이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평단과 관객의 호응은 더욱 뜨거웠다. <셔터>는 올해 칸영화제 직후 할리우드의 뉴리전시사에서 리메이크하기로 결정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다. 결혼을 앞둔 친구들과 파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진사 턴과 그의 연인 제인은 교통사고를 낸다. 차에 치인 여자를 병원에 데려갈 것인가 아니면 내버려두고 도주할 것인가. 턴의 제안을 받아들인 제인은 결국 피흘리는 여자를 뒤로 하고 사고 현장을 뜬다. 그리고 이튿날. 턴은 친구의 대학졸업 사진을 찍어주다 머리 풀어헤친 여자 귀신을 보고, 제인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귀신에게 시달린다. 전날 사고로 죽은 여자의 혼령이 나타난 것이라는 제인의 말을 믿지 않는 턴은 그러나 자신이 찍은 사진에 연속적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기운들이 찍히자 제인과 함께 사고 현장에 다시 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문제의 그날,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죄책감이 길어올린 환영과 악몽은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급기야 심령학자를 찾은 제인. 원혼은 그리움 때문에 잠들지 않고 떠돌고 있으며, 사진에 나타난 혼령은 그 사진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듣는다. 제인은 문제의 사진이 찍힌 해부실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턴의 대학 시절 여자친구 나트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자신에게 너무 집착해서 나트리와 헤어지게 됐다고 고백한 턴은 얼마 뒤 자신을 찾아와 알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던 친구가 자살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뿐 아니라 다른 친구 둘도 뭔가에 쫓겨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고 소스라친다.

<셔터>가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배치한 설정들과 심어놓은 장치들은 익숙하다. 동급생이었지만 따돌림을 당했던 여자의 원혼이 친구들에게 복수를 하는 설정은 <여고괴담>을 떠올리게 하고, 귀신의 머리카락이 자라나 제인을 덮치려 하는 장면은 <검은 물 밑에서>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분명하다. 나트리와 그의 어머니 또한 <싸이코>의 노먼과 그의 어머니의 관계에서 힌트를 얻어 비튼 것이라고 보여진다. 효과가 소진된 듯한 흔한 공포 이미지를 끌어와 암실과 아파트와 해부실 등 시각적으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익숙한 공간들에 전시하지만, 이상하게도 <셔터>는 시종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리드미컬한 편집과 효과적인 사운드 때문만은 아니다.

<셔터>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말미에 뒤통수를 후려치진 않는다. 붉은색 현상용액 위에서 출렁이는 네 남자의 모습을 담은 오프닝은 이들이 과거의 어떤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있음을 일찌감치 보여준다. 턴은 쉽사리 나트리와의 관계를 제인에게 털어놓는다. 사랑했던 여인이 원혼이 되어 나타나 자신을 버린 남자를 괴롭힌다는 귀신 이야기. 영화가 너무 이르게 많은 것을 내보이는 것 아닌가, 외려 보는 이가 우려할 무렵, <셔터>는 불쑥 다른 시선을 요구한다. 턴의 고백이 흘러나오는 동안 관객은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가 진실을 모두 털어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과 함께 비명을 지르던 관객은 이제 턴을 의심하고, 제인을 동정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공포는 현재로 옮겨와 또 다른 파편을 날린다. 셔터에 포착된 핏빛 과거가 끊임없이 현실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사진이라는 오브제는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서다. 턴이 숨기려고 한 과거, 제인이 추궁하려고 했던 과거, 턴과 제인의 친구들이 죽음에 이르는 과거, 원혼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과거, 이 모든 과거가 사진을 통해서 조금씩 형상을 드러낸다. 핏빛 암실에서 현상되는 끔찍한 비명의 진실은 과연 뭘까. 무엇보다 깜짝 충격 효과만으로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이지 않는 건 <셔터>의 미덕이다. 꼼꼼한 드라마투르기는 <빈 집>의 호러 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장면까지 힘을 잃지 않고 보너스로 공포를 안긴다. 과연 <셔터>는 한국 관객도 홀릴 수 있을까.

<셔터>의 반종 피산다나쿤팍품 웡품 감독

“귀신 사진에 관한 영화들이 없다는 것에 끌렸다”

최근 1, 2년 동안 타이영화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꼽으라면, 영화를 전공한 신인감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예외적인 존재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을 제외하면 논지 니미부트르, 위시트 사사나티앙, 펜엑 라타나루앙, 지라 말리쿤 등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감독들이 영화가 아닌 광고, 뮤직비디오, TV 등에서 경험을 쌓았다. <셔터>를 공동 연출한 반종 피산다나쿤과 팍품 웡품 감독은 바로 윗세대 감독들과 달리 출라롱컨대학과 랑싯대학에서 영화와 필름비디오학을 전공한 이들. 그러나 이들도 곧바로 영화계에 진입하진 못했다. 광고회사 페노메나에서 조감독으로 함께 일하고 있던 두 사람은 상업영화를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회사 덕에 기회를 얻게 됐다고. 단편영화를 틈틈이 만들다 “좀더 장르적이고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페노메나에 장편영화 아이템을 제출한 것이 <셔터>의 시작.

애초 두 사람이 만들려고 했던 영화는 호러가 아니었고, 환생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을 찍은 오래된 사진을 발견했고, 그 사진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미스터리한 귀신 사진에 관한 영화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다른 아시아 호러영화들을 참조하면서 어떻게 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는 게 두 사람의 말. 이들이 가장 공을 쏟은 공정은 스크립트다. 드라마를 짜내기 위해 요구되는 공포영화의 관습들을 쳐내는 작업들에 힘을 쏟았다. “주인공이 버려진 폐허에 들어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든지, 굳이 열 필요가 없는 문을 따고 들어간다든지 하는 장면들은 넣지 않았다.”

1억바트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인 두 사람은 현재 따로 차기작을 준비 중이다. 두 사람 모두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피산다나쿤은 AIDS에 걸린 한 여자가 쓴 인터넷 일기를 바탕으로 “죽음 앞에서 뒤늦게 낙관을 얻게 되는 한 인간”의 삶을 영화로 옮길 계획. 웡품은 세사부트르라는 실제 인물을 내세워 절대 군주에 대항한 1932년의 역사적인 상황을 재연하는 매우 정치적인 드라마를 만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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