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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 3인의 현장 [3] - 신한솔 감독의 <싸움의 기술>
사진 이혜정김수경 2005-07-05

나도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감독의 현장을 주목하는 이유 셋!

하나! 백 선생의 선택

신인감독의 스타메이커인 백윤식은 신한솔을 “장준환 더하기 최동훈”이라고 표현했다. <싸움의 기술>은 판수와 병태라는 독서실에서 만난 두 인물이 벌이는, 나이차를 넘어 주고받는 교감과 공고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왕따, 학교폭력, 가정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하드보일드한 소년담을 조합하려 한다.

둘! 파렴치한 그러나 매혹적인 상상력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은 “신한솔 감독은 영화아카데미 1년 후배였다. 아카데미는 처음 입학하면 누구나 다섯컷짜리 영화를 찍는다. 이전까지 봉준호 감독의 다섯컷이 제일 유명했는데 16기 신한솔이 그걸 뒤집었다. 달나라에서 인형들이 섹스하는 내용의 그의 작품에 15기 전원이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졸업작품 <염소가족>이 무척 파렴치하고, 유치한데 그걸 눈 딱 감고 해치우는 이상한 매력을 가졌다”라고 말한다.

셋! 배짱은 원칙엄수에서부터

제작자가 참석한 <싸움의 기술> 첫 촬영. 체육관 관장과 병태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2분짜리 마스터숏을 준비한 신한솔 감독은 조용하게 열여덟 테이크를 간다. 소요된 필름만 무려 6천자. 이러한 배짱이 스탭과 배우들에게 설득력을 얻는 것은 현재까지 매일 찍어야 할 촬영분량과 스케줄을 어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싸움의 기술>의 판수(백윤식)는 한국형 칼리토 브리간테다. 바하마로 떠나려던 칼리토처럼 그는 모든 과거를 접고 멕시코 칸쿤으로 가려고 군산으로 왔다. ‘왕년에 잘 나가던’ 모든 형님들이 그러하듯 판수도 정상적으로 이 나라를 뜰 수 없다. 위조여권을 기다리는 그는 1개월 뒤면 폐쇄될 독서실에 숨는다. <싸움의 기술>은 여기서 정형화된 갱영화의 ‘폼’의 길에서 벗어난다. 독서실에 숨어 있는 칼리토. 라면을 끓여 위스키를 마시고, 자신의 라이터를 훔쳐간 범인을 찾아다니며 잔소리하는 판수는 최근 한국영화의 ‘형님’들 중 가장 기괴하고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다. 그런 판수의 옆자리에 또 다른 사연의 인생이 있다. 형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졸지에 인문계에서 공업고등학교로 전학 온 병태(재희). 그에게 학교는 지옥이다. 바닷바람과 선반에 단련된 빠코(홍승진)와 그 일당들은 병태를 ‘호구 중 호구’로 낙점한다. 왕따 겸 샌드백인 병태의 유일한 꿈은 싸움을 잘하는 것이다. 지옥 같은 학교를 피해 밤이면 병태도 독서실을 향한다. 물론 책상에 놓인 책은 절권도, 격투기 교본 따위지만. 그리고 그는 판수에게 싸움을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판수는 무협지를 읽으며 낄낄대고, 맥주값을 병태에게 전가하는 동네 건달의 소소함과 “피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직업 건달이 가진 트라우마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판수라는 판타지의 캐릭터는 병태라는 가혹한 현실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것이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가진 개성이다.

왕따가 칼리토를 만났을 때

영화 <싸움의 기술>을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병태에게 가해지는 소년들의 학교폭력은 ‘시동’이며 판수와 병태의 관계는 본격적인 ‘주행’이다. 판수는 백윤식의 말처럼 “소년 병태를 통해 생각지 않던 인생의 주사위”에 올라탄다. 6월21일 화요일 밤, 월명동 군산여고 뒤쪽 대명독서실. 판수와 병태가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촬영분이다. “사람들이 너무 잘 맞는 역이라고 해서 외려 부담스럽다”는 백윤식은 촬영에 방해가 되는 망원경으로 쳐다보는 동네 주민에게 손을 흔들어줄 정도로 여유만만이다. 덧붙여 “내가 보기에는 앤서니 퍼킨스인데, 누구는 제임스 딘이라네”라며 재희를 칭찬한다. 실제로는 현판만 남은 독서실 옥상에 앉은 판수와 병태. 여주인공 영애(최여진)가 자신을 구해준 두 사람과 술자리를 갖는 장면이다. 물총을 든 판수는 아래층에서 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다. 병태는 영애에게 판수를 ‘아는 선생님’으로 소개한다. 이에 영애는 판수에게 “어느 과목 선생”인지를 묻는다. 판수는 “싸움”이라고 답한다. 당혹스러워하는 영애에게 판수는 예의 그 낮고 깊은 목소리로 “살아가는 것, 인생 그 자체가 싸움인 거야”라고 부연한다.

학교라는 이름의 지옥

굳이 판수의 잠언을 빌리지 않아도 병태에게 이미 학교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주말 촬영, 벽을 뚫고 얻어터진 얼굴의 병태(재희)가 나타난다. 달리는 병태를 따르던 스테디캠 앵글에 뒤이어 성난 얼굴의 세 소년들이 들이닥친다. 스모그와 먼지 속에서 의자를 쓰러뜨리고 도망치는 병태를 잡기 위해 공작대 위를 뛰어넘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따르는 빠코, 악어(신현탁), 붕어(전재형). 신한솔 감독의 “다치면 안 돼, 무리하지마”라는 충고는 테이크가 진행될수록 온데간데없다. 해가 저물자 달리던 소년들은 폐공장의 작업장 같은 공작기계실의 바닥에 엎드려 있다. 빛바랜 녹색의 연삭기와 그 앞에 선 소년들의 푸르죽죽한 작업복은 우울하고 굳은 그들의 표정과 궤를 이룬다. 연삭기 앞의 모범생 10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5명은 전부 엎드린 채 팔굽혀펴기를 한다. “손가락 잘리고 싶어, 소년원 다녀온 게 벼슬이야.” 지휘봉을 든 담임선생(맹봉학)의 고함치는 대사가 쩌렁쩌렁 울린다.

판수 역의 백윤식

이 영화가 담아내는 학교풍경은 살벌하고 건조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며, 권력관계는 더욱 명징하게 표현된다. 그곳에서 최하층민 ‘왕따’ 병태가 몸으로 적어내려가는 학교의 ‘수난일지’는 지독하다. 빠코와 병태의 악연이 병태 아버지인 형사 병호에 의해 극대화되는 대목은 <싸움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학교가 법과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드보일드한 학교의 정경과 독서실의 안온한 풍경은 극적인 대구를 이룬다. 판수가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자 자연인”인 동시에, 상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듯이. 드라마 구조에서 판수는 주로 병태를 통해서만 현실 세계와 연관된다. 이것이 판수를 “병태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인물” 혹은 “판타지를 통해 가공된 인물”이라고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근거다. 판수를 통해 트레이닝된 병태는 독서실에서 학교를 향해 조심스럽게 한발씩 나아간다.

“싸움을 잘하는 것”은 열일곱, 열여덟 소년들에게는 어른들이 꿈꾸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닮은 흔해 빠진 욕망이다. 한국영화에서도 ‘준수한 외모’와 더불어 지겹게 반복된 상업적인 코드이기도 하다. <싸움의 기술>은 이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지만, 그러한 욕망의 이면을 동시에 파고든다. 판수는 무엇보다 “싸움을 피할 줄 아는 싸움꾼”이다. <파이란>의 강재처럼 비루한 현실에 침잠하거나, <친구>의 동수처럼 의리를 입에 올리며 낭만적으로 몸을 내던지는 일은 판수에게는 없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판수는 “싸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싸움터에서 가장 강한” 무협물에 등장할 법한 기묘한 인간형이다. 영화의 초입에서 병태가 판수가 정말 고수일까하고 의구심을 품는 것도 이러한 판수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싸우라고 가르치는 건 아니야

병태는 계속 더 어려운 상황과 더 강한 적에 맞부딪치지만 판수는 자신의 힘으로 손쉽게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병태에게 “그럼 예전처럼 죽어 있어”라고 과거를 끄집어내며 냉정하게 말하는 판수의 모습은 통상적인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다. <싸움의 기술>의 ‘싸움’은 생존 혹은 생활을 뜻한다. 병태에게 싸움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고, 판수에게 그것은 잊고 싶은 과거가 묻어 있는 일상이다. ‘기술’은 “삶에 대한 의지 혹은 태도”를 뜻한다고 감독은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판수는 병태에게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싸움과 주먹 쓰는 법을 가르치지만, 실상 그것은 심리적인 압박을 극복하거나 자신의 신체의 발달된 부분(이를테면, 자주 맞다보니 빨라진 눈썰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것에 다름 아니다. 로망 롤랑의 말처럼 “인생은 왕복차표가 아니므로” 싸우든 물러서든, 그것은 병태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싸움’의 첫번째 ‘기술’이다.

“하류인생에 숨어 있는 스승에 관한 영화다”

신한솔 감독 인터뷰

-<싸움의 기술>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시작은 4년 전쯤이다. 스토리보다는 먼저 멘토(Mentor: 스승)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영웅이나 멘토는 스테레오 타입이 대부분이더라. 하류인생에 숨어 있는 멘토 같은 존재가 아이의 눈으로 포착되는 걸 잡아내고 싶다는 착상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한 바탕에 학교문제와 가족사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끼어들고 미스터리 같은 장르적 요소가 가미되어 현재의 <싸움의 기술>이 되었다.

-싸이더스에서 나와서 코리아엔터테인먼트로 옮겼다. 옮기고 정확히 1년 만에 촬영에 들어갔는데.

=싸이더스 때는 시나리오도 준비가 부족했고, 전체적인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이후 현 제작사로 옮긴 뒤 여러분들이 잘 도와줬고 캐스팅과 투자에도 운이 따라줬다. 시나리오도 전보다 훨씬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그 과정에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나 최동훈 감독도 자주 힘이 되어주었다.

-판수는 어떤 인물인가.

=일종의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다. 병태라는 소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판타지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람 같지만 한편으로 상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괴리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판수와 병태를 함께 얘기하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속성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출발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찍으면서 리얼하고 무게감이 있다고 느낀다”는 말을 자주 하더라.

=판수라는 캐릭터가 판타지의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은 최대한 사실감 있게 가야 한다는 원칙 때문일 것이다. 대비되는 효과가 필요하니까. 인물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공간도 마찬가지다. 독서실을 제외한 공간은 최대한 리얼하게 간다.

-왜 하필 군산이고 공업고등학교인가.

=군산은 과거에는 번성했으나 이제는 퇴락한 느낌이 강한 도시다. 비어 있는 가옥이나 굴뚝만 남은 공장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군산은 한국영화에서 부분적으로는 자주 드러났지만 도시의 속성이 제대로 보여진 적이 없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한편으로 영화 안에서는 군산이라는 도시 자체의 퇴색된 느낌이 공업고등학교에까지 확장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싸움의 기술>은 단편 <혹성탈출>이나 <염소가족>에서 알려진 당신의 발칙한 상상력이나 유머와는 좀 거리가 있다.

=이번 영화에도 유머러스하고 엉뚱한 재미는 곳곳에 있다. 판수를 수호천사라고 했는데 원래 천사들이 장난기가 많다. 그리고 공개할 수는 없지만 <싸움의 기술> 다음 작품은 지금 언급한 단편처럼 발칙한 걸로 구상해놓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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