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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만 보면 따고 싶어!
2001-07-19

어리숙한 병따개의 범행 이야기, 하이네켄 광고

제작연도 2001년 제품명 Heineken Beer 제작사 Bates, Singapore 아트디렉터 Camilla Bjornhaug, Preben Moan 포토그래퍼 Erwin Olaf

머리뚜껑 열릴 일이 생겼다. 사건의 시작은 평소부터 애물단지라 생각하던 자동차 때문. 늘 하던 대로 빌딩 앞 공터에 겹치기로 주차해놓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뒤차 주인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울린다. 다섯개 층을 걸어 내려가서 차를 뺀 것까지는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평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가 차를 가지고 나올 때부터 이 정도의 다리품 대여섯번쯤 팔 각오는 했던 터였다. 때마침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그 지점에서 일이 꼬였다.

갑자기 뒤쪽에 우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트렁크 레버를 당겨 뚜껑을 열어놓고 차문 밖으로 나섰다. 웬걸, 헛간 같은 짐칸을 다 뒤져도 우산은커녕 그림자도 안 보인다. 또 한번 뚜껑이 열린다. 육두문자를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시동을 걸어놓고 문을 잠가버린 걸 떠올린다. 제기랄, 무슨 이 따위 경우가 있어! 차 밖에는 얼간이 하나가 물걸레가 돼 서 있고 걸어잠긴 차 안에서는 애꿎은 엔진이 저 혼자 부릉대는 꼴이라니. 간간이 와이퍼까지 비웃듯이 허리를 흔들어대는 진풍경. 그런 수난이 7월 초순 어느 날씨 꾸질꾸질한 날 내게 닥쳐왔던 것이다.

이럴 경우, 손재간 있는 누군가는 혀를 두어번 끌끌 차고는 곧바로 다음 동작으로 들어갈 것이다. 주변에 나뒹구는 철사조각을 주워서 창틈새로 꾸역꾸역 밀어넣고는 걸쇠를 풀어 젖히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맥주병 하나 따는 것도 오프너가 없으면 해결할 엄두를 못 내는 손방이 바로 나란 위인이다. 웬만한 사내라면 숟가락이나 젓가락, 심지어 생이빨로도 씀풍씀풍 잘만 따는 물건이 병뚜껑 아니던가? 정말 이래저래 머리뚜껑만 열린다.

사실인즉 <씨네21>에 넘길 이 광고꼭지를 앞에 놓고 글의 실마리를 풀지 못해 주리를 틀고 있던 참이었다. 글감은 몇개 꼬불쳐 놓았지만 이것저것 성에 차지 않아 갈 때까지 미적거리고 있었다. 에라, 한번만 사정을 해볼까? “백은하씨! 저 웬만하면 원고빵꾸 안 내는 거 아시죠? 요번 한번만 딴걸로 땜빵 해 줄 수 없을까요?” 아냐, 그러다가 상습범으로 찍히는 수가 있어.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다가 지하철에서 방금 나온 <씨네21>을 손에 넣는다. 어라 이런 쾌재가? 국내광고 꼭지가 빠졌잖아. 그렇다면 내 원고도 자동 지불유예되는 거 아냐? 그런데 이 칼럼쓰는 조재원 기자, 기껏 쓴 원고가 불방된 거 보고 뚜껑 열린 건 아닐까? 그런 기분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모르고 말고! 날밤을 새면서 토끼눈을 하고 간신히 넘긴 글이 그냥 증발됐을 땐 더욱 열통 터지지(그렇다고 일일이 연락을 해줄 수 있을 만큼 <씨네21>이 한가한 잡지는 절대 아님을 충분히 안다).

이래저래 마감은 지나버렸다. 미안함을 씻을 겸 해서 시원한 맥주 한잔 올리기로 한다. 그리고 나를 열받게 한 똥차사건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광고를 빙자해서 오늘 저녁에는 맥주 한잔 퍼야겠다. 때마침 이 하이네켄 광고에는 병따개들이 즐비하니 그냥 입만 가져가면 된다는 거 아냐? 헐헐….

이 광고를 만든 이들은 낄낄댔을 것이다. ‘우린 맥주만 보면 따먹고 싶단 말야.’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갈증이 있을 거 아냐?’ 하지만 ‘따먹는다’는 말엔 묘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뭔가 음흉스럽고 불량기가 묻어 있고 성희롱 같은 비릿한 냄새까지 느껴진다. ‘섣불리 표현했다간 저질광고로 몰리기 딱 십상이고….’ ‘도대체 싸구려 선술집에 붙어 있는, 야릇한 색깔의 포스터와 뭐가 달라지겠어?’ ‘아무래도 그건 사람이 할 짓은 아닌 것 같아, 그치?’ ‘그럼, 그런 얘기를 딴 녀석이 대신 하게 하면 어떨까?’ ‘동물이 나오는 것도 너무 상투적이고…. 옳지 수가 있다! 병따개 녀석에게 악역을 맡겨버리는 거야.’ ‘병따개라…. 그래, 녀석 생긴 꼬락서니만 봐도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물건이야.’

이 구실 저 구실 동원해가며 술먹을 건수를 만들어내는 주당들의 심리가 이런 거 아닐까? 으슥한 밤거리 뒷골목에서 오프너 하나가 하이네켄 맥주를 노리고 있다. 걸리기만 하면 냉큼 따버릴 태세를 하고서. 거기에 슬로건이 범행동기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이네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It could only be Heineken)(<광고1>).

피해자인 하이네켄이 거품을 입에 물고 나뒹굴고 있다. 병따개 녀석, 마무리하는 솜씨를 보아하니 역시 지능범은 아닌 것 같다. 초범이 늘 그렇듯이 범행현장에 재차 나타나서 확인하는 초조함까지 보이는 걸 보니 더더욱 그렇다. 포토라인 뒤에서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병따개들 뒤에 숨어서 엿보는 것까지 쏙 빼닮았다(<광고2>).

‘Call Me!’라는 문어발광고에다 전화번호를 남겨놓은 것까지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이다. 그 앞에서 침을 꼴깍대며 기웃대는 오프너 하나. 아무리 병따개를 시켜서 못할 짓을 시켜놓았지만 어째 노는 모양새가 그 동네나 이 동네나 한통속인 것 같다. 이런 끈적끈적한 표현이 판매로까지 연결될지, 아무튼 술광고의 마케팅 효과는 뚜껑을 따기 전에는 모를 일이다(<광고3>).

이현우/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 hyuncom@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