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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의 비루한 욕구, <플란다스의 개>

강아지가 실종됐다. 이건 큰일인가. 사건 축에도 못 끼는가. 의외의 소득인가. 즐거움인가. <플란다스의 개>에선 그 모든 것이다. 강아지를 생의 마지막 위안으로 여기던 노파에겐 죽음이고, 그보단 덜 쓰라리다 해도 강아지를 동생처럼 돌보던 아이에겐 사랑의 상실이다. 반면 신경 예민한 시간강사에겐 소음 제거라는 목표의 달성이고, 개의 육질에 매혹된 경비원과 부랑자에겐 영양 보충의 귀한 계기다. 엉뚱하게도 경비실 여직원에겐 자아실현의 기회도 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강아지 실종이라는 작은 사건을 아파트라는 소시민의 생활공간에 던져놓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예기치 못할 소동에 빠져드는지를 관찰하는 짓궂은 농담이다.

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난 단편 <지리멸렬>에서처럼, 생활공간에서 일어난 일상적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유머러스하게 극화하고 있다. 제목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에서 따뜻한 동화의 위안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동화 <플란다스의 개>는 개가 등장한다는 것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봉 감독은 “일상을 재료로 장르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회적이지만 따뜻하고 잔인해보이지만 소프트하고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인 영화를 그리면서 일상의 재미를 쫓아가려 했다”

중심인물은 시간강사 윤주와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이다. 국문학 박사인 윤주는 돈 버는 아내한테 사람 대접 못 받고 교수 자리는 아득한데, 강아지는 짖어대니 미칠 노릇이다. 강아지는 그의 적이다. 없애야 한다. 첫 번째 강아지는 납치 및 감금에서 끝났지만 두 번째 강아지는 잔인하게도 추락사시킨다. 무서운 눈빛의 경비 아저씨와 부랑자에게 윤주는 결과적으로 두 차례 음식을 헌납한다. 그들의 반대편에 정의감은 있지만 주변머리 없고 약간 모자라는 20대 초반 여성 현남이 있다. 그는 실종된 강아지를 찾아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강아지를 못 찾으면 학교에도 안 가겠다는 아이와, 강아지가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 강아지의 생존을 둘러싼 이 선명한 전선은 윤주의 아내가 사온 강아지가 실종됨으로써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영화는 가파른 추적극으로 바뀐다.

이상하게도 사건이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은 내면적으로 점점 멀어진다. 윤주는 뜻하지 않게 경비실 아저씨와 부랑자에게 음식을 헌납해 임시 공조관계가 형성된 것 같지만, 윤주의 아내가 사온 강아지가 실종되는 순간부터 양자는 적이 된다. 현남의 마음을 움직인 울먹이던 아이는 새 강아지를 구해 즐거워함으로써 현남을 어이없게 하고, 할머니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조력자 현남에게 기껏 무말랭이를 유산이란 이름으로 남겨 허탈케 한다. 가책을 느낀 윤주가 현남에게 어정쩡한 범행 자백을 해도 멍청한 현남은 못 알아듣는다. 사건이 종결되자 모두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부랑자가 감옥으로 가는 게 얼핏 중요한 결말처럼 보이지만 아파트 지하보다 감옥이 못하지는 않으니 대단한 변화는 아니다. 경비 아저씨는 어떤 혐의도 받지 않으며 윤주는 돈을 써서 드디어 교수까지 된다. 불운하게도, 모두에게 선의를 갖고 뛰었던 현남만이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태만을 이유로 쫓겨난다. 한바탕 우스꽝스런 소동이 지나가고 난 뒤 놀랍게도 세상은 조금더 사악해진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웃음은 이상하다. 난센스코미디에다 만화적 기법까지 동원되는 유머의 퍼레이드는 지루할 틈을 안 주지만, 유머의 단맛에 빠져 있다보면 어느새 냉소의 쓴맛이 스며들어 나중엔 무슨 맛인지 분별하기 힘들다. 어떤 등장인물도, 매우 그럴듯하지만, 심금을 울리진 않는다. 보는 사람을 겉돌게 하면서 그냥 얼마간 웃다가 가라고 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실없는 농담은 아니다. 마지막에 현남과 그의 선한 친구 뚱녀는 산으로 간다. 가면서 카메라를 향해 그러니까 관객을 향해 거울로 햇볕을 비추는 장난을 한다. 왜 산으로 가는 걸까. 유일하게 선한 주인공을 실없는 세상에 남겨두기 싫다는 감독의 뜻일까. 감독 자신이 실없는 농담을 했으니 그냥 산으로 숨겠다는 뜻일까. 관객에게 당신들이 웃고 있는 동안 세상이 더 나빠진 걸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저 불협화음을 즐기는 악취미인가. 봉준호 감독은 웃기지만 아리송한 질문을 남기는 이상한 코미디 한편으로 데뷔했다.

<플란다스의 개>의 조연들

개를 둘러싼, 혹은 둘러싸인 이웃사촌들

변희봉

김호정

<플란다스의 개>는 윤주와 현남의 심리적 반응이 줄기를 이루지만, 실종된 개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욕구가 극의 갈등을 이끈다는 점에서 조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영화다. 강아지 시체를 발굴해 요리해먹고 러닝머신으로 웨이트트레이닝까지 하는 기이한 경비 아저씨 역의 변희봉은 이 중에서도 가장 낯익은 연기자. 숱한 TV 드라마 특히 사극에서 성격 강한 조연으로 연기인생을 채운 베테랑이다.

윤주의 성깔 있는 아내 은실은 1997년 백상예술 연극부문 인기상 등 수상경력이 화려한 연극배우 김호정이 맡았다. 노장 김수용 감독이 지난해에 만든 <침향>에서 이세창과 함께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데뷔했으나 개봉이 계속 미뤄지는 바람에 <플란다스의 개>가 영화 관객에게 선을 보이는 첫 영화가 됐다. 68년생으로 연극 <아이싱> <꽃잎 같은 여자 물 위에 지고> 등의 작품에 출연해왔다.

경비 아저씨와 함께 개장국 쟁탈전을 벌이는 부랑자 역의 김뢰하는 연우무대에서 활동중인 연극배우. 대사는 별로 없지만 기괴한 표정이 잘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퇴마록> <송어>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봉준호 감독과는 단편 <지리멸렬>에서 술 취해 남의 아파트 앞에 변을 보는 검사로 출연한 인연이 있다. 현남의 친구 뚱녀 역을 맡은 고수희 역시 극단 동승무대에서 활동중인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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