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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하고 못된, 혹은 마약같은
2001-02-06

<컷런스딥> 음악 정원영

비오는 거리. 쏟아지는 비를 뚫고 이제 막 세상에 눈뜬 소년 벤과 사랑에 눈뜬 고급콜걸 미나가 숨이 찰듯 달린다. 그들의 사랑이 처음으로 확인되는 이 장면에 흐르는 사랑의 노래, <러브테마>는 얼핏 잔잔한 피아노곡처럼 들리지만 정원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저분한 발라드”다. 피아노 선율 아래 마치 모스 부호처럼 귀를 불편하게 만드는 규칙적인 기계음들을 숨겨놓은 이유. 그것은 고급스럽고 서정적이기보다는 더럽고 지저분한 “못된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이재한 감독의 요구 때문이었다. 마약에 취한 듯한 인트로 <트립>부터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 쓰인 <러브테마>까지 정원영은 <컷런스딥>의 모든 음악 속에 조금씩 의도된 흙탕물을 튀겨놓았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장난도 많이 쳤죠.” 지난해 여름, 홍익대 근처 달파란(강기영)의 작업실에서 정원영과 달파란은 “완전히 공동작업”으로 <컷런스딥>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생소함과 익숙함. 재즈 피아니스트인 정원영의 감성에 달파란의 엉뚱함이 뒤섞인 음악의 느낌은 어린 시절 이민간 한국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영화가 가지는 감성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버클리 유학 시절, 정원영은 하루에 비디오를 4편 넘게 빌려다보던 영화광이었다. “하버드스퀘어의 한 소극장에서는 매일 2편의 영화를 테마별로 상영했거든요. 어떤 날은 ‘공포’, 어떤 날은 ‘섹스’ 이런 식으로요. 그땐 영화스케줄을 달력에 표시해놓고 매일 챙겨보는 게 제일 큰 즐거움이었던 것 같아요.” <칼리귤라> 같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영화들을 괴성을 질러가며 보는 재미에 좋아하는 술자리를 마다하기도 했다. 90년 말 귀국한 뒤 정원영이 영화음악 제의에 선뜻 응한 것도 의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영화판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낮 12시에 프린트를 들고 와서 그 다음날 12시까지 완성해라, 이런 식이었어요.” 유난히 후반작업에 인색한 제작환경에 그는 “다시는 영화음악 안 한다”며 등을 돌렸고 97년 이후로는 세션이나 음반작업에만 몰두했다. 그런 정원영을 다시 영화판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재한 감독과 JD였다. “편집까지 마친 상태에서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 감독은 자기가 생각한 느낌과 닮은 기존곡을 미리 프린트에 깔아왔더라고요. ‘음악을 아는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더 큰 이유는 JD 때문이었지만.” (웃음) 무표정 속에 슬픈 카리스마를 감춘 “너무 멋진 ”보스 JD(데이비드 맥기니스)와 “코드가 맞는” 이재한 감독은 그에게 “영화음악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몇년 사이 작업환경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즘 같으면 일할 맛 나죠.” 정원영은 지난해에 한상원, 이적 등과 결성한 그룹 긱스활동 외에도 “이제는 영화음악 작업도 꾸준히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음악하는 사람의 이율배반적 이상이지만 차이밍량의 <애정만세>같이 음악이 필요없는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인데…”라는 심히 밥그릇 걱정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글 백은하 기자lucie@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hyejung@hani.co.kr

프로필/

1960년 서울 출생ㆍ79년 그룹 쉼으로 데뷔ㆍ84년 미국 버클리음대 프로페셔널 뮤직 전공ㆍ93년 1집 <가버린 날들>ㆍ 95년 영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음악ㆍ96년 2집 ㆍ97년 영화 <불새> 음악ㆍ98년 3집 <영미 Robinson>ㆍ99년 그룹 긱스 1집 <노올자>, 영화 <컷런스딥> 음악ㆍ2000년 긱스 2집 <동네음악대>, 서울예대 실용음악과, 서울 공연예술학교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