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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칼럼] '남자니까 남자니까 남자니까', 노희경 드라마의 매력

마음은 청춘인데,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이 한스럽다.

얼마 전, KBS 창사 특집극으로 제작된 드라마 한 편이 상하이 국제TV 페스티벌에서 드라마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수상 기념으로 재방송을 할 테니 여러분 모두 시청해달라는 내용의 광고를 봤는데 드라마 제목은 <유행가가 되리> 란다. 유행가가 되리? 유행가가 되리. 순전히 제목이 좋아 재방송 시간을 기다렸다.

여기 서로가 지긋지긋하고, 삶이 권태로운 중년 부부가 있다. 임기를 한 달 앞둔 남편은 이렇게 퇴물이 되는구나 싶어 착잡하고, 아내는 하루 종일 남편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다.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살가운 말 한 번 할 줄 모르는 아내가 싫고, 광고회사 국장이라는 잘난 명함 하나 달고 바람이나 피웠던 남편이 가증스럽다. 그들은 한스럽다. 마음은 청춘인데,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이 한스럽다.

그때 한 젊은 여자가 남편에게 접근한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젊고 예쁜 여자다.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여자가 먼저 내리면서 말한다. “다음 번엔 아저씨가 데려다 주셔야 해요. 남자니까.” 남자니까. 남자니까. 남자니까. 남자니까. 남자의 귓가에 마지막 말이 맴돌면서 입가에 웃음도 돈다.

고장난 라디오처럼 ‘남자니까’를 반복하는 TV 화면을 보며, 솔직히 많이 놀랐다. 중년 남자의 심리를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극본 참 잘 썼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노희경 작가의 극본이었다.

‘노희경’이라는 이름 석자가 나오기까지 서두가 길었다. 이번 글에서는 뜬금 없지만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희경 드라마에 등장한 명대사에 대해서.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뽑은 것이니 다른 이들은 전혀 기억 못할 수도 있다.

난 그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손꼽을 만한 드라마는 뭐니 뭐니 해도 <거짓말>이다. 손에 꼽기도 어려울 만큼 좋은 장면과 대사가 많았던 드라마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성우(배종옥)가 말한 ‘난 그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이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고민 끝에 이별을 결심하는데 친한 선배에게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잊을 수 없대. 근데 나는 잊을 수 있을 거야. 난 그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그 선배는 남자를 포기하라고 여자에게 수 차례 충고한 바 있었다. 그의 아내는 빛 같고 소금 같다고, 단 몇 분만 봐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아내를 남자가 잊을 수 있겠냐고.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던 여자는 ‘빛 같고 소금 같아’라는 말에 긴 한숨을 내쉬었고, 결국 남자를 포기하며 ‘난 예쁘지 않으니까’를 말한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는 평범한 사람들의 유치하고 어리석은 마음들을 참 소중하게 다룬다. ‘난 예쁘지 않으니까’라든지 ‘나보다 예뻐?’ 같은 말은 사실 얼마나 유치한가. 초등학생이나 하지, 어른이라면 창피해서 입에 담기 힘든 말이다. 그러나 내게는 ‘난 그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말하면서 우는 장면이 그 어떤 그럴듯한 장면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유치하고 별 것 아닌 상처, 그래서 입 밖에 내기도 쑥스러운 상처가 사실은 더 결정적인 상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가가 되리>도 비슷한 이유로 마음이 가는 드라마였다. 무심코 던진 ‘남자니까’ 한 마디에 가슴 떨려 하는 중년 남자의 유치함을 그저 유치함으로 끝내지 않는 따뜻한 배려가 노희경 드라마에는 있다. 이복동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 거창한 상처를 주로 다루는 드라마의 물결 속에서 작고 사소한 상처를 건져 올리는 이와 같은 드라마가 앞으로 많아졌으면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처를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일이야말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주로 시청하는 TV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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