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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 <반칙왕>
2000-02-01

본의 아니게 살인극에 휘말리는 산장의 가족들이 ‘코믹 잔혹’한 웃음을 선사했던 데뷔작 <조용한 가족>과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두번째 영화 <반칙왕>은 웃음의 색깔이 좀 이상한 코미디다. 실적 위주의 사회에서 부적응자에 가까운 은행원의 지지부진한 일상과 이제는 한물간 프로레슬링의 세계가 엉뚱하게 맞물려 쓴웃음과 폭소의 묘한 배합을 이룬다. 물론 웃기고 짠한 부조리극처럼 매순간 희비가 교차하는 게 세상살이인지라, 전혀 낯설기만한 배합은 아니지만. 출근길 지하철 유리창에 눌린 임대호의 얼굴처럼 주눅든 소시민의 일상에서 사각의 링 위로 뛰쳐나간 일탈은 소박한 자아 찾기의 과정을 짠한 웃음으로 풀어나간다.

TV 속 프로레슬링 장면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개의 장으로 나뉜다. 우선 은행원 임대호의 윤기없는 일상을 따라가는 ‘공포의 헤드록’부터 유비호와 혈투를 벌이는 ‘사각의 진혼곡’까지. 지각대장에다, 은행직원 중 유일하게 한 계좌도 못 튼 대호는 부지점장에게 눈엣가시다. 부지점장은 화장실에서, 복도에서 헤드록을 걸어오고 대호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짝사랑하는 조은희는 그를 거들떠도 안 보고, 친구 두식이나 아버지와 뭔가 얘기를 해보려 해도 새삼스러워 그저 소원할 뿐이다. 대호의 지지부진한 일상은 우연히 레슬링체육관의 관원모집 광고를 맞닥뜨리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다. 얼결에 체육관에 들어선 대호는 장관장과 그의 딸이자 프로모터인 민영의 지도 아래 반칙 레슬러로 훈련받는다.

무기력한 일상을 덤덤하게 따라가던 영화의 리듬이 활기를 띠는 것도 이즈음부터. 파란 바지에 빨간 망토를 두른 채 체육관 동료 오대산과 벌이는 첫 시합과 함께 기발하고 엉뚱한 웃음의 상상력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대호는 로프에서 뛰어내려 공격하는 오대산을 똥침으로 저지하는가 하면, 반칙 도구로 밀가루를 쓴다는 게 심판한테 뿌린다. 실수로 가짜 포크 대신 진짜 포크로 오대산의 이마와 어깨를 푹 쑤셔 피가 분수처럼 튀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 도시 외곽의 후미진 링 위, 20∼30명을 앉혀 놓고 벌어지는 시합은 70년대 최고의 스포츠였다가 빛바란 사진 속 추억이 된 프로레슬링에 대한 묘한 향수까지 끌어낸다.

하지만 대강의 판을 짜고 하는 시합에서 처절한 혈투로 뒤바꾸는 유비호와의 경기에 이르면, “슬픈 코미디”를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서로 엎어치고 메치고, 누르고 눌리고, 꺾고 꺾이며 둘 중 하나가 포기할 때까지 뒤얽혀 싸우는 사각의 링은, 정글같고 “동물의 왕국” 같은 세상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환호 속에 등장한 유비호가 로프 위에서 멋지게 한 바퀴 돌아 뛰어내리고, 노란 고무줄과 못 달린 슬리퍼를 동원한 반칙 장면까지만 해도 낄낄거리던 관객이 어느 순간 웃음을 완전히 거두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동물의 왕국. 그걸 보면 말야. 세상 살아가는 법칙이 다 나와. 자연의 섭리, 약육강식, 적자생존…”하는 부지점장의 대사를 굳이 빌리지 않아도, 부지점장의 무리한 대출 요구를 거절한 두식이 결국 사표를 내고 쓸쓸히 물러나오는 현실은 링 위의 세계와 닮아 있는 것이다.

<반칙왕>의 미덕은 그러나, 현실 풍자의 예리함이라기보단 우화와 동화의 경계에 선 웃음이다. 무기력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의 장으로 철 지난 프로레슬링을 끌어오고, 조은희의 싸늘한 반응에 고백을 맺지도 못하고 꽃다발을 떨어뜨리며 도망가는 대호의 뒷모습 등 빠르고 각박한 요즘 사회와 동떨어진 듯한 시대 착오는 소박한 온기와 향수를 담고 있다. 타이틀부터 의상, 뒷골목 아이들 장면 등 곳곳에 산재한 키취 및 패러디 감성과 어어부프로젝트의 익살맞고 걸쭉한 음악도 웃음에 한몫하는 감초들. 초당 360프레임을 찍는 초고속 카메라 포토소닉 4ER을 미국에서 들어와 찍은 레슬링 장면 등 생동감있는 촬영과, 노란 색조로 화면을 감싸는 조명이 빚은 영상도 볼 만하다.

<반칙왕> 영화음악

어어부밴드, 다시 영상을 만나다

<조용한 가족>이 탁월한 팝 선곡으로 코믹잔혹한 영화의 리듬을 살렸다면, <반칙왕>의 영화음악은 국산 밴드 어어부프로젝트의 창작곡들이 맛깔스럽게 영상에 들어맞은 예다. 어어부프로젝트는 장영규, 백현진 두 명으로 구성된 인디밴드. 96년 첫 음반 <손익분기점>으로 데뷔했는데, 당시 타악기 연주자 겸 영화음악가 원일이 함께 하면서 국악 리듬을 활용한 음악을 시도했다. 97년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에서 행려들의 모습과 절절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세상에-어느 가족 줄거리>도 어어부프로젝트의 솜씨. 허스키하게 목에서 끓어오르는 걸쭉한 음색과, 트로트부터 온갖 소리를 이용한 전위음악까지 폭넓은 음악 실험을 들려주는 이들의 음악은 <반칙왕>의 웃기고 서글픈 코미디에 잘 들어맞는다. 이번 영화음악은 장영규씨가 모두 작곡했고, 보컬 백현진씨는 때로 절규하듯, 때로 웅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우선 귀에 남는 곡은 대호가 은행 계단에서,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서 연습하며 레슬러의 기초를 닦아가는 장면 위를 훑어가는 폴카 풍의 <사각의 진혼곡>. 서커스나 유랑극단에서 나올 법한 폴카에다 레슬링 광경을 익살맞게 묘사한 가사가 경쾌하다. 대호가 피로한 하루 끝에 뒷골목 아이들한테 얻어맞고 강변에 앉아 맥주를 마실 때 하모니카 반주와 함께 흐르는 <무더운 하루>나, 창작곡은 아니지만 조은희의 집 앞에서 고백에 실패하고 도망칠 때 나오는 백현진 버전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낸 그 느낌처럼>도 절절히 화면과 어우러지는 음악. 첫 장면의 선율을 비롯한 연주음악까지 서글프고 웃기는 코미디의 질감을 잘 살렸다. 1월 말에 발매되는 O.S.T에는 창작곡만 12곡이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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