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스텝 25시
카메라는 늙지 않는다
2001-02-07

<광시곡> 촬영감독 박승배

20년 만에 서울을 하얗게 뒤덮은 폭설로 박승배(63)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은 자꾸 더뎌지고 있었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뵙기 힘든 요즘 영화판에서 예순을 훌쩍 넘긴 노장과의 인터뷰는 사실 긴장되는 자리였다. 게다가 나이보다 많은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촬영부의 ‘살아있는 전설’로 알려진 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약속시간 10분 전, 드디어 ‘무비캠’이라고 쓰인 자그마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옷 매무새를 다시 한번 추스르고 사진기자를 앞세워 사무실로 들어선다.

얼핏 복덕방을 연상시키는 그곳에는 같은 연배의 어르신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은백의 머리 위에 얹힌 멋진 카우보이 모자 때문. 이미 현장에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통하는 모자다. 좀더 근엄한 모습을 기대한 탓일까. 모자 밑에 숨겨진 개구쟁이 같은 표정에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틈을 타 주위를 둘러보니 촬영감독 사무실답게 카메라 모델 사진과 코닥에서 선정한 세계 100대 촬영감독들이 얼굴이 실린 포스터가 벽면을 빼곡이 장식하고 있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나… 그래 전쟁 막 끝나고 어수선할 때였지.” 한국전쟁으로 거슬러올라간 그의 이야기는 예전에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날 얘기처럼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는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 종로에서 나고 자라 12살이 되던 해 전쟁을 만난다. 격랑의 세월을 이겨내고 청년으로 장성한 그에게 고모부는 자신이 일하던 삼성영화사에 들어올 것을 제안한다. 그땐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에 고모부 일을 도와드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메라에 강렬히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다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1기생으로 입학한다. 영화과에 진학하는 학생들 중 대부분은 배우나 연출가를 희망했고 그중에서 박승배의 진로는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영화과 40주년 기념식이 있었어. 뭐 연설을 하라고 하는데 할말이 있어야지. 그저 격세지감만 느끼고 왔어.”

대학다니는 5년 동안, 일년에 10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줄잡아 50∼60편의 영화를 만든 셈. 그렇게 틈틈이 쌓아올린 조수 경력으로 졸업 뒤 이듬해인 67년, 한형모 프로덕션에서 <폭로>라는 작품으로 데뷔식을 치른다. 그때 나이 28살. 정진우 감독을 비롯해 전우열, 임권택, 하길종, 김수용 감독과 인연을 맺으며 활동하다 73년 일본 연수를 목적으로 영화진흥공사에 입사한다. 입사 뒤 주력한 분야는 국책영화로 주로 반공영화와 계몽영화를 제작하는 일에 매달렸다. 전쟁의 실상을 다룬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증언>(임권택, 1973), <전쟁의 얼굴>(김수용, 1973)과 광복 3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태백산맥>(권영순, 1975)이 당시 참여한 영화들이다. 전쟁영화는 특수촬영이 빠질 수 없는 분야이기에 일본 기술진이 건너 와 촬영을 돕기도 했다. *75년 영진공을 나와 주로 이원세 감독 밑에서 작업을 한 그는 78년 현대자동차(주) 홍보실에 입사하여 본격적인 홍보영화 제작에 열을 올린다. “전쟁 직후에는 방송용 카메라가 따로 없어서 뉴스를 필름으로 만든 건 알고 있지? 기업 홍보용도 마찬가지야. 당시 사우디나 리비아에서 시공업체를 선발할 땐 다 홍보영화 보고 골랐거든. 홍보영화 만드는 게 아주 붐이었어. 특수효과도 많이 쓰고 해서 폼나게 만들었지.” 홍보영화 찍으면서 특수효과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공식 촬영을 마치고나자 마침 선우광고(주)에서 입사 제의를 해왔다. 광고계는 영화판보다 훨씬 카메라 실험이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란 걸 알았기에 망설임 없이 제의를 수락했다. 그의 예상대로 다양한 특수효과를 익힐 수 있었던 자리였다. 91년 광고계를 나와 다시 영화판에서 맹렬한 활동을 재개한다. 93년 <걸어서 하늘까지>로 영평상 촬영상을 수상하고, 98년 <넘버.3>로 황금촬영상을 수상한 그는 이제 더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정상에 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만 쉬셔도 되지 않겠냐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살아 있는 ‘전설’이니 ‘역사책’이니 하는 말은 하지마. 그건 내가 죽고 난 다음에 해. 알았지?”

사실 요즘엔 촬영스케줄이 예전만 못하다. 신인감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견감독들도 젊고 감각적인 영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만큼 일자리가 줄어든 까닭이다. 예전에 같이 일한 감독 가운데 일을 접은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래도 현장을 떠날 생각은 아직 없다. 사무실을 차린 뒤로 일이 있건 없건,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와의 약속 때문이다. 연출일변도의 학교수업이나 감독만을 목표로 영화판에 뛰어드는 젊은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과 같이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알아줄 날이 올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자신이 가진, 결코 수업을 통해서는 익히지 못하는 현장에서의 노하우들을 부지런히 전수할 예정이다. 현재 그는 단국대와 영상원을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신작 프로젝트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금홍아 금홍아>의 각본을 쓴 유지형 감독의 <백일몽>이 그것이다. 3월쯤 크랭크인 예정이다. *그는 요즘 자신을 치고 올라오는 혈기 왕성한 후배들을 보면 뿌듯한 맘과 더불어 가슴 한쪽이 뻐근해 온다. 자신이 영화를 배울 때보다 장비나 기술적 측면에서 훨씬 나아지고 있음을 느끼지만,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경험의 축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감독 데뷔에 대한 협회의 규정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인준장치가 있었으면 하는 속내도 있다. *카메라는 늙지 않는다. 그를 보면, 카메라맨도 늙지 않는다. ‘이순’을 넘긴 나이지만, ‘입지’의 청년들과 함께 그는 여전히 새로운 영화를 꿈꾸고 있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simssisi@dreamx.net

개인 프로필

1939년생

65년 한양대 영화과 졸업

67년 <폭로> 촬영감독 데뷔

73년 영화진흥공사 기술부 입사

78년 현대자동차(주) 홍보실 입사

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 공식촬영

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공식촬영, 개인 사무실 ‘무비캠’ 오픈

89년 선우광고(주) 입사

93년 영화기술지 <영상기술> 편집장 역임 현재 한국영화 촬영감독협회 학술위원,

사단법인 한국광고영상 제작자협회 감사

67∼2000년 극영화 100여편 촬영감독

수상경력 72년 제9회 청룡영화상 기술상(<석화촌>)

73년 제9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제11회 촬영기술상(<달빛사냥꾼>)

제12, 18회 황금촬영상 <우리시대의 사랑>)

89년 영평상 촬영상(<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93년 춘사영화제 촬영상(<걸어서 하늘까지>)

98년 제20회 황금촬영상(<넘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