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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에서의 영적 구원, <비상근무>

이 거리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정신나간 마약중독자들, 임신한 창녀들, 칼과 총으로 구멍난 시체들,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죽어가는 부랑자들이 구급요원 프랭크를 기다리고 있다. <비상근무>에 담겨진 90년대 초 뉴욕 뒷골목의 밤풍경은 단연코 아비규환이다. 영광의 도시 뉴욕은 지옥의 그늘을 감추고 있다가 밤이 되면 끔직하고 흉칙한 맨살을 이렇게 드러낸다. 프랭크도 이 악몽의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자신의 미숙으로 죽은 한 소녀의 혼령이 그에게 치유불능의 불면증을 심은 뒤로 그의 얼굴은 말기 암환자처럼 변했다. 죽어가는 인간들의 호출에 몽유하듯 끌려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독백대로 “죽음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목격하는 것”뿐이다. 그럴수록 프랭크의 안색은 더욱 검게 변해간다.

뉴욕시의 병원에서 10년간 구급요원으로 일한 조 코넬리의 원작소설이 폴 슈레이더의 각색과 마틴 스콜세지의 연출을 거쳐 다시 태어난 <비상근무>는 스콜세지적인 너무나 스콜세지적인 영화다. 제작자 스콧 루딘이 “원작을 보자마자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스콜세지뿐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할만하다. 25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태어났으니 <비상근무>는 <택시 드라이버>의 아들뻘인데, 공히 마틴-폴의 파트너쉽이 만들어낸 이 부자는 한눈에 알아볼만큼 생김새가 닮았다. 뉴욕의 택시운전사 트래비스 비클과 구급요원 프랭크는 뉴욕의 밤거리를, 그것도 차를 몰고 돌아다녀야 하는 팔자라는 점에서 같다. 뉴욕은 두 사람 모두에게 구원의 신호가 보이지 않는 불모지다. 둘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데다, 원인불명의 불면증을 앓고 있으며, 이타적 동기로 움직인다는 점까지 일치한다.

물론 세대차는 있다. 프랭크가 훨씬 착한데 현실은 프랭크에게 더 쓰라리다. 주연배우의 이미지부터 달라져, 로버트 드 니로의 메마른 카리스마를 대신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슬픔에 젖은 눈빛으로 독백한다. 트래비스 비클이 폭력으로 구원을 꿈꾼 반면, 프랭크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현실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 그런데도 실패의 연속이다. 언젠가부터 그가 응급치료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숨을 멈춘다. 그러니 이곳을 떠나는 게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벗어날 수가 없다. 해고당하기 위해서 지각을 해도 반장은 “내일 또 지각하면 꼭 잘라주지”라며 앰뷸런스 열쇠를 건네준다. 시간은 밤에서 멈추어선 것처럼 어둠의 연속이다. 두어차례 선사되는 햇살은 프랭크가 견딜 수 없는 피로로 방에 몸을 뉘었을 때 유리창으로 아스라하게 스며들뿐이다. 뉴욕의 밤거리는 출구가 막힌 폐쇄회로이고, 프랭크는 어두운 도시에서 고행을 강요당하며 병들어간다.

트래비스 비클의 나쁜 성격을 나누어 가진듯한 파트너들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또다른 짐이 될뿐이다. 래리는 현실의 악몽을 망각함으로써 버텨나가고, 월스는 폭력사건이 일어나길 오히려 고대하며 악몽을 즐긴다. 열렬한 기독교도 마커스는 프랭크가 절망적으로 응급치료에 매달릴 때 소란스럽게 기도를 올린다. 단 한사람의 예외가 메리라는 여인이다. 의식을 잃은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눈물 고인 채 바라보는 이 착한 여인은 프랭크에게도 기꺼이 손길을 내민다. 수녀의 상투적인 설교를 통해 세속 기독교를 냉소하고, 신의 뜻을 끝없이 회의하면서도 프랭크의 고통스런 일상엔 종교적 수난기의 비장감이 감돈다.

삶은 변함없는 악몽이고 구원에의 열망은 여전하지만 <비상근무>는 스콜세지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따뜻한 기운이 스며있다. “지난 25년간 우리는 가정을 갖고 자식을 낳고 성공도 맛보았다. 세월의 무게만큼 더 성숙해졌으며 <택시 드라이버> 때보다는 성숙해진 감각을 이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스콜세지는 말한다. 반영웅의 관습적 요소가 말끔히 지워진 주인공은 더이상 마초적 광기의 소유자가 아니며,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현실적이고 섬세해졌다. 마지막에 이르면 섬세한 조명으로 비춰진 프랭크의 얼굴엔 성자의 이미지와 함께 희망의 기운까지 느껴진다. 대신 이야기는 더욱 일상화되고 서스펜스적 요소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스콜세지는 영화광적 쾌락을 버리고, 세속도시에서의 영적 구원이란 평생의 주제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셈이다.

스콜세지의 긴 그림자

각본/ 폴 슈레이더

<비상근무>는 스콜세지적인만큼 폴 슈레이더적이다. 스콜제지의 대표작 목록에 올라있는 <택시 드라이버><분노의 주먹><예수 최후의 유혹>은 폴 슈레이더의 각본이다. 거세된 마초의 내면적 균열을 드러내는 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콜세지의 영화적 힘은 폴 슈레이더의 냉소적인 지성을 만나 비로소 만개했다. 엄격한 칼빈교도 집안에서 자라 뒤늦게 영화의 세속적 쾌락에 눈뜬 슈레이더야말로 마피아를 동경하면서도 신부를 꿈꾼 스콜세지의 내면과 소통하는 데 더할 수 없는 적임자였을 것이다.

슈레이더는 작가이기 이전에 총명한 영화이론가였고 감독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46년생인 슈레이더는 UCLA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26살에 <영화의 초월적 스타일: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뛰어난 영화연구서를 펴내 비평가로 먼저 이름을 얻었다. 이 시기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시나리오 <야쿠자>는 35만달러라는 고가로 워너에 팔려 시드니 폴락이 영화로 만들었다. 1978년에는 디트로이트 자동차공장의 타락한 노동조합을 다룬 <블루 칼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의 연출작들은 스콜세지보다 훨씬 다양한 편이지만, 장르영화에 거의 눈길을 안주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꾸준하게 탐구하며 미국 작가주의 감독의 계보에 올랐다. 리처드 기어가 남창으로 등장한 <아메리칸 지골로>(1980), 표범인간의 근친상간을 다룬 <캣 피플>(1982)은 소재의 선정성에 힘입어 그에게 대중적 명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느리고 집요한 심리 연출 솜씨도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에게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일본의 탐미주의적인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정신세계를 탐구한 <미시마>(1985)는 슈레이더의 왕성한 지적 탐구욕과 실험정신이 극에 달한 작품. <라이트 오브 데이>(1987), <베니스의 열정>(1991), <라이트 슬리퍼>(1992) 등으로 작품 목록을 이어온 슈레이더는 <어플릭션>(1998)에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국내에선 비디오로만 출시된 <어플릭션>은 점차 파멸해가는 시골 경찰의 자폭적 광기를 그린 수작으로 여러 면에서 <택시 드라이버>를 연상시킨다. 오랜 영화 동료인 스콜세지와 슈레이더에겐 공히 <택시 드라이버>가 떠났다가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영화적 고향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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