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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뭐든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친절한 금자씨>

투덜양,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영화미술의 자의식 과잉에 대해 생각하다

없이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씨네21> 513호에 실린 김소영 교수의 <친절한 금자씨> 평에 따르면 나는 ‘친절한 금자씨’과가 아니라 찌질한 종두씨(<오아시스>)과다. 또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과가 아니라 희멀건 두부과다. 성능은 떨어져도 무조건 예쁜 총을 선택하는 금자씨가 아니라 ‘그까이꺼’ 대충 싸구려 꽃다발 달고 임대아파트로 털레털레 걸어가는 종두가 내 친구였던 것이다. <오아시스>를 그리 재미있게 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임대아파트 또는 서민아파트에 대한 나의 친연성은 꽤나 유서 깊다. <소름>이나 <강원도의 힘>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은 내가 임대아파트과인 탓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잡는 트집인데 나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방이 등장하는 순간 허걱했다. 얼룩말 무늬를 연상케 하는 검붉은 벽과 어둡고 기하학적인 무늬의 이불,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임대아파트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화장대와 그 위에서 타고 있는 붉은 촛불. 아, 정말 부담스러웠다. 임대아파트 벽에는 꼭 너덜너덜한 신문지와 술 광고 달력이 붙어 있으며 장롱은 반드시 비닐로 된 비키니 옷장이어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으로 넘쳐나는 이 방을 보니 금자에게 한마디하고 싶어졌다. 금자야, 우진(<올드보이>)이야 돈 많아서 돈지랄이라도 할 수 있는 형편이었지만 지금 너의 시국은 경제적으로 보나 뭘로 보나 이럴 시국이 아니잖니. 그럼 우리의 금자씨 이렇게 대답하겠지. “너나, 잘하세요.” “네….”

모든 영화의 미술이 리얼리즘적 표현에 입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술도 주인공의 대사나 행동 못지않게 많은 걸 이야기하는 영화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러니 창작자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데 두말없이 동의한다. 그런데 금자의 방을 보면 어깨에 잔뜩 힘주고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단 <친절한 금자씨>만이 아니다. <분홍신>에서 기괴하면서도 우아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선재의 집이나 최근 리얼피판에서 필름으로 본 <시계 태엽 오렌지>에서 알록달록 울긋불긋한 주인공의 집 벽지들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심리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게 바로 지옥의 느낌이란다”,“뭔가 우아함이 느껴지는 공포지?”,“사이키델릭의 정수를 보여주마”라고 설명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절규하며 외치는 벽지와 가구들의 향연을 보는 느낌이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미술가 최정화씨가 그런 말을 했다. “좋은 영화미술은 보이지 않는 미술”이라고. 최씨가 참여했던 영화미술에 대한 평가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아무리 멋진 미술이라도 스스로 멋지다고 외치는 듯한 미술은 잘난 척하는 우등생을 보는 것 같아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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