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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폭주족이 한패가 되다, <불량공주 모모코>

사실 모모코가 그리 불량한 학생은 아니다. 술과 담배를 하는 것도, 거리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로코코 시대의 복장에 푹 빠져 있을 뿐이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만을 입는 모모코는, 자신이 18세기 프랑스의 공주 혹은 귀족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언제나 드레스를 입고, 로로코 시대의 귀족들처럼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한다. 나만 즐거우면 됐지, 가 모모코의 주장이다. 그래서 모모코는 친구가 없다.

전직 야쿠자인 아버지가 팔다 남은 짝퉁 베르사체를, 인터넷으로 팔아치우려는 모모코. 그걸 사겠다고 찾아온 이치코는, 시커먼 화장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여고생 폭주족이다. 너무 착하고 마음이 약해서 늘 왕따였던 이치코는, 우연히 만난 폭주족 리더 아키미에게 반해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언제나 얼굴을 찡그리며 껌을 씹고, 목소리를 깔면서 침을 찍찍 뱉는다. 말대꾸를 하거나, 짜증이 나면 바로 박치기를 한다. 그런데 왜 이치코는 모모코의 친구가 되는 것일까?

<불량공주 모모코>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두 여고생의 우정을 그린 영화, 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너무나도 다른, 모모코와 이치코의 우정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저 외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소똥이 널린 시골 마을에서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에 양산을 들고 다니는 모모코의 유일한 즐거움은 다이칸야마에 있는 ‘Baby, the stars shine bright’란 가게에서 ‘공주 옷’을 사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모코는 ‘롤리타 룩’에 흠뻑 빠진 오타쿠다. 이치코는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동네 폭주족의 일원으로 욕과 폭력은 기본이다. 한마디로 비전이 전혀 없는 불량학생이다. 전혀 다른 모모코와 이치코 사이에서 통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친구’로 만들었을까. ‘관계’에 돌진하게 만들었을까. 모모코와 이치코가 전형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부에 내쳐진 반항아, 꼴통들이라는 것 정도?

다케모토 노바라의 원작소설 <시모츠마 이야기> 자체가 희한한 스토리였다. 폭주족과 오타쿠가 나오지만, 전혀 하드보일드하지 않고 소녀적이지도 않다. 나른한 몽상을 그리면서도, 정도(正道)에서 한참 이탈한 소녀들의 방탕을 그리면서도 전혀 비관적이지 않다. 아니 <불량공주 모모코>는 오히려 세상에 대해 한없이 긍정적이다. 그러면서도 낯간지럽게 아양을 떨지 않는다. 하소연하지도 않고,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CF 출신의 신인감독 나카시마 데쓰야가 ‘CF의 순발력과 순정만화의 감성’을 융합해 만들어낸 도발적인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는 스타일 그 자체로 신세대의 모든 것을 말한다. 애니메이션과 말풍선, 정지화면과 불연속적인 편집 등으로 어지러운 <불량공주 모모코>는 새로운 감성으로 가득 차 있다.

<불량공주 모모코>의 감상을 한결 즐겁게 하는 것은 모모코의 후카다 교코와 이치코의 쓰치야 안나의 매력이다. 맹하면서도 뭔가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후카다 교코와 신비한 매력의 쓰치야 안나의 조합은, 불협화음으로 들리다가도 갑자기 천상의 화음으로 고양되어 황홀감에 빠지게 한다. 웃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두 배우의 연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이전에 출연했던 영화 <음양사2>나 <돌스>에 비해, 후카다 교코는 드라마에서처럼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역을 연기한다. <녹차의 맛>에 나왔던 모델이자 가수인 쓰치야 안나도 인상적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량공주 모모코>는 즐겁다. 또한 <카우보이 비밥>에서 절정에 달했던 간노 요코의 음악과 실제로 존재하는 브랜드 ‘Baby, the stars shine bright’의 닭살 돋는 드레스들이 <불량공주 모모코>의 눈과 귀를 절정으로 밀어간다.

<불량공주 모모코>는 만화적인 공상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금 일본의 10대는, 아니 한국의 10대도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살고 있다. 어떤 삶이 올바른 길인지, 혹은 좋은 길인지 알 수가 없다. 갖가지 위험과 유혹으로 가득하다. 그 복마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는 것은 어렵다. 모모코와 이치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나름대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타쿠와 폭주족에서 행복을 발견했을 뿐이다. 무능력한 아빠를 버리고 떠나가는 엄마에게, 초등학생인 모모코는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라고. 그 말처럼 모모코 역시 자신의 행복을 ‘로코코’에서 찾았다. 남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모모코는 오타쿠로서의 길을 굳건하게 간다. 이치코도 마찬가지다. 왕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역할모델이 된 아키미를 따라간 것이다. 나쁜 말로 하자면, 현실에서 도망쳐 거짓 위안을 찾은 것뿐이지만.

모모코와 이치코가 친구가 된 이유는, 그들에게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카시마 데쓰야의 말에 따르자면 ‘모모코의 독기와 이치코의 근성’이다. 모모코는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하지 않는다. 로코코 시대에 살았다면 우아하게 정원을 거닐다가 격정적으로 쾌락에 빠져들다 하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21세기다. 비탄에 빠질 법도 하지만, 모모코는 긍정적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모모코는 한다. 이치코를 위해 수예를 뜨고,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관계’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치코는 근성이 있다. 첫사랑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이치코는 자신의 반항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왕따는 안 당하지만, 폭주족 그룹의 동료들이 진정한 친구가 아님도 알고 있다. 극복한 것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허울 속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다. 이치코는 모모코를 보고 그것을 깨닫는다. 집단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애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끈기있게 나아가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실 <불량공주 모모코>가 교훈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자신의 길만 잃지 않으면 된다는 뻔한 진리를 은근히 조장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신선하다. <불량공주 모모코>는 절대로 어떻게 하라, 고 떠들어대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이나 신화에 기대지도 않는다. 모든 여자 폭주족을 평정하고, 야쿠자 조직까지 박살낸 히미코 전설은 그저 매력적인 픽션일 뿐이다. 그런 신화나 집단, 이데올로기에 기대 사는 인간들은, 다 똑같다. 그럴 바에야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소똥이나 밟으면서 살아가겠다는 발칙한 농담이 <불량공주 모모코>에는 담겨 있다. 꽤나 불량한 방법으로. 오타쿠와 폭주족이 친구가 되고, 그들이 한길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보통의 영화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블량공주 모모코>처럼 도발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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