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시나리오 작가
2001-02-08

충무로작가열전 (1) 최금동

요즘에야 시나리오 공모와 발표로 해가 지고 달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지만 이러한 현상의 연원은 그다지 길지 않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물에 콩 나듯 이뤄졌으니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아예 진귀한 뉴스거리로 취급받았던 게 당연하다. 최금동은 그 가느다란 물줄기의 발원지에 위치해 있다. 국내 최초로 손꼽히는 1936년의 <동아일보> 시나리오 공모에 <환무곡>이라는 작품으로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당시 약관 20살의 작가가 최금동이다. 이 작품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이 <애련송>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각색하여 <동아일보>에 연재된 다음 1939년에 김유영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됐다. 최금동은 이후 50년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줄기차게 시나리오를 써왔다. 탈고된 시나리오가 100편을 바라보고 그중 영화로 만들어진 것만도 50편에 육박하니 국내 최초의 본격 시나리오작가로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최금동은 외골수의 작품세계를 추구해왔다. 나는 국내외를 통틀어 그만큼 역사의식과 민족혼에 투철한 작가를 따로 알지 못한다. 이는 아마도 그의 성장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고향은 전남 함평이지만 부친이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까닭에 늘 왜경을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완도 근처의 신지도에서 신문배달을 하는 고학생으로 초등학교를 마쳤을 때의 나이가 무려 17살이었다고 하니 그가 겪었을 핍박과 가난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서울로 상경한 그는 얼마 전 타계한 미당 서정주와 함께 중앙불교전문대(현재의 동국대)에 다니면서 문학과 영화에 눈을 떠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성공적인 데뷔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일제 말기로 치달아 차기작이 나올 때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두 번째 작품인 <새로운 맹서>는 강제징용중 해방을 맞고 고향에 돌아온 청년들이 마을처녀들과 힘을 합쳐 희망찬 조국을 재건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여배우 최은희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전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예견케 한 작품이 김래성 원작의 <청춘극장>. 당시 신상옥과 함께 충무로를 호령하던 홍성기 감독의 작품인데, 김진규와 김지미 등 당대의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하여 일제하 젊은이들의 독립투쟁과 사랑을 가슴 벅차게 그려내 커다란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1966년과 1975년에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최금동의 작품세계가 만개한 것은 1960년대 이후. 갑오농민전쟁을 다룬 <동학란>, 광주학생운동을 다룬 <이름없는 별들>, 만주항일투쟁을 다룬 <정복자> 등 민중사에서부터 공민왕과 신돈을 그린 <다정불심>이나 필생의 역작인 <아 백범 김구선생> <성웅 이순신> 등 왕조사 내지 민족영웅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전체를 자신의 원고지이자 화폭에 그려넣었던 세월이다. 이쯤되면 일개 시나리오작가가 아니라 아예 민족운동가 정도로 분류돼야 마땅하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최금동은 작품의뢰를 받아 주문생산을 하는 대신, 스스로 주제와 소재를 찾아 몇년씩이나 그것에 몰두하는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유명하다. 생존 당시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동학란>은 12년, <팔만대장경>은 17년, <이순신>은 20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고쳐쓴 작품이라고 한다. 단순히 상업영화 작가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덕분에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세월만큼 버전업(version-up)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권영순의 <에밀레종>(1968), 조긍하의 <상해임시정부와 김구선생>(1969)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최금동의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부끄러워진다. 자랑스럽고 의연했던 선배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얄팍한 상업주의에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5주기를 맞은 지난 2000년 11월,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신미도에 ‘최금동문학비’를 건립하여 그의 치열했던 작가정신을 후대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다.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39년 김유영의 <애련송>

47년 신경균의 <새로운 맹서>

59년 홍성기의 <청춘극장> ★

59년 전창근의 <삼일독립운동>

59년 김강윤의 <이름없는 별들>

60년 권영순의 <흙> 60년 전창근의 <아 백범 김구선생> ★

61년 홍성기의 <에밀레종>

62년 최훈의 <동학란>

63년 권영순의 <정복자>

67년 신상옥의 <다정불심>

71년 이규웅의 <성웅 이순신> ★

72년 주동진의 <의사 안중근>

74년 김기덕의 <유관순>

86년 김수용의 <중광의 허튼 소리>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