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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를 대신하는 활동사진의 쾌락, <형사 Duelist>
김도훈 2005-09-06

멀고 먼 옛날 조선에서. <형사 Duelist>는 여느 나그네의 요설처럼 막을 올린다. 아니, 영화의 프롤로그는 정말로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여인네에게 유혹당하는 나그네의 요설이다. 극과 상관없는 프롤로그가 갑자기 중단되면, 장터에서 잠복근무 중인 좌포청의 안 포교(안성기)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처럼 걸걸한 남순(하지원)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화폐위조범들의 출처를 알아내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병조판서(송영창)와 그의 하수인인 슬픈눈(강동원)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남순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슬픈눈과 사랑에 빠지면서 임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이명세는 더이상 서사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서사의 공백을 대신하는 것은 활동사진의 쾌락이다. 고속촬영과 저속촬영, 프리즈 프레임(정지화면), 색감과 명암의 급격하고 다양한 변화를 통해 보여지는 화면은 ‘활동’ 그 자체로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이명세의 자신감으로 보인다. 자연스레 미장센도 형식미를 과용한다. 프로덕션디자인은 고증보다 상상력에 기대고, 조명은 종종 빛과 어둠을 흑백으로- 병조판서의 바둑알처럼 혹은 만화의 한 페이지처럼- 극단적으로 갈라놓는다. 특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빛을 드나들며 벌이는 슬픈눈과 남순의 돌담길 액션장면은 지독하게 아름다운 이명세식 형식미의 절정을 탐한다.

<형사 Duelist>가 일본적인 양식미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마당에 흐트러지게 핀 붉은꽃은 꽃꽂이(生け花)와 다르지 않고, 가면을 쓰거나 무표정한 모습의 슬픈눈은 전통극 노(能)를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의 꿈결같은 대결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숨어서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극 분라쿠(文樂)와 닮아 있다. 이명세는 운명의 사슬을 끊지 못해 격정적인 대결을 벌이는 캐릭터들 위에 인형 조종사처럼 군림한다. 그래서 <형사 Duelist>는 종종 무협이라기보다는 무협인형극에 가까워 보인다.

당대의 스타일리스트가 자신의 장기를 극한으로 밀어붙여 창조한 <형사 Duelist>는 실로 아름다운 천지지만, ‘활동사진’의 사전적 의미를 되묻고 있는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탐미적인 활동사진을 즐기기 위해서는 비어 있는 서사에 마음쓰지 않고 “감정의 리듬을 지탱하는 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몸과 움직임”이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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