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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컬트
2001-07-26

컴퓨터 게임/ 사적인 게임 읽기

세상에는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이 있다. 누가 봐도 잘 만들었고 흠잡을 데를 찾기 어려운 게임이 있는가 하면, 100명이면 99명이 쓰레기라고 부르는 게임이 있다. 하지만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시간만 아까운 게임이 있다. 또 반대로 객관적으로는 못 만든 게임인데도 나한테만 각별하게 와닿는 게임이 있다.

고에이의 <삼국지>는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엄청난 팬덤을 형성하고 있고,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게임이다. 나 역시 <삼국지>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건 이미 나온 지 오래인 3편이다.

<삼국지> 3편을 처음 접한 건 어느 겨울이었다. 그때 난 좁고 더럽고 추운 집에서 살고 있었다. 밤에 싸늘한 침대에 들어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고,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치다보면 손이 곱아왔다. 추위를 잊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커다란 머그에 하나 가득 홍차를 타고 책상에 앉는다. 나보다 더 떨고 있는 어린 강아지 두 마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컴퓨터 전원을 넣는다. 그리고 <삼국지>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그래도 추운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내 무릎으로 파고들어 잠을 청한다. 뜨거운 홍차에 체온은 조금씩 올라가고, 게임을 하는 사이사이 조그맣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끼어든다. <삼국지>를 하며 천하통일에 열을 올리다보면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나로서는 <삼국지> 3편을 그 추운 방과 분홍색 발바닥과 볼록한 배의 털북숭이 강아지들, 그리고 따뜻한 홍차 한잔과 떼어놓고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밝고 따뜻한 집으로 이사했다. 강아지들은 이제 다 커서 무릎 위에는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삼국지>는 벌써 8편까지 나왔다. 그래픽은 말할 것도 없고, 시스템 역시 놀라울 만큼 발전했다. 하지만 나는 3편이 더 좋다. <삼국지>뿐 아니라 요즘 나오는 그 어떤 화려한 게임도 나의 외롭고 따뜻한 추억을 대신할 수는 없다.

텍스트는 일단 세상에 나오면 무한 진화를 반복한다. 제작자의 의도 같은 건 소비자한테 중요하지 않다. 텍스트의 독해는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경험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 중 텍스트를, 게임을 읽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사람이 내가 보기엔 별볼일 없는 게임에 대해 극찬하는 걸 보면 궁금해진다. 이 게임의 어떤 부분이 그의 은밀한 개인적 역사를 자극한 것일까? 샘이 나기도 한다. 나로서는 찾을 수 없는 즐거움을 찾아낸 행운에 대해서. 이런 걸 들쑤셔보는 것에는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재미가 있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라든가 인맥을 유지하기 위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게임에 대한 평가를 왜곡시키는 걸 보면 슬퍼진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부정하는 셈이다.

나는 밸런스가 엉망이고 진부한 줄거리의 롤플레잉게임 <폴리크롬>을 내 인생의 게임 첫 번째 위치에 올려놓고, 독밋 이야기를 <폴아웃>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 꼽는다. <디아블로>의 던전에 처음 들어갔다가 몰려오는 적들 때문에 칼을 버리고 도망친 이야기를 몇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들먹이고, 급하게 써야 할 글을 팽개치고 <대항해 시대>를 하느라 날밤 새운 일로 아직도 잔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침대 위에 벌렁 누워 코를 골고 있는 개들의 모습이 조운, 장비, 관우와 겹쳐지는 걸 어쩔 수 없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