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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청춘 스케치
2001-07-26

심혜진의 트렌드 만화 <그녀석과 나>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만화와 일본만화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보기에 낯선 홍콩만화도 역시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 눈에는 전부 하나의 덩어리다. 글로벌한 시각에서 우리 만화의 정체성은 동아시아만화에,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일본만화와 연동하고 있다. 은근슬쩍 들어온 일본만화가 우리 만화시장을 장악해가기 시작하던 90년대 초반 ‘한국’만화에 대한 고민과 반성, 전망이 이어졌다. 그러나 시장은 일본식 시스템으로 재편되었고, 젊은 작가와 독자들은 일본식 시스템이 쏟아내는 만화에 길들여졌으니 ‘한국’만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에 찍힌 방점을 ‘만화’로 옮겨, 한국‘만화’를 고민한다면, 일본과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동일한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렌드 장르를 공략하라!

일본과 우리나라 독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트렌드는 장르와 소재, 표현, 연출과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일본과 공유하는 트렌드를 ‘일본풍’이라고 불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은 우리나라의 유행을 주도했다.

90년대 후반 격주간 잡지의 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심혜진은 일본풍 만화를 그리는 작가로 받아들여졌다. 잡지의 ‘땜빵만화’(연재작가의 펑크를 메우는 비상용 만화)로 시작했다가 인기가 올라 본격 연재로 이어진 <안녕하세요? 세바스찬입니다!>는 꽃미남의 커플링을 암시하는 백작과 집사의 관계가 등장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사람과 까마귀 커플이지만 때에 따라 아주 멋진 남남 커플로 변화한다. 연재계획 없이 시작된 만화이기 때문에 백작과 세바스찬이라는 설정을 기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시추에이션 형식으로 풀어갔다. 독자를 사로잡은 것은 시추에이션에 등장한 애드리브였다. 3등신으로 희화된 캐릭터, 일본만화를 통해 낯익은 각종 기호들(몇개의 빗금으로 표시되는 부끄럼, 두 줄기 눈물이 보여주는 황당함과 같은)이 수시로 등장하는 강력한 애드리브는 90년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첫 연재작이 예상 외의 큰 성공을 거둔 뒤 심혜진은 후속작 <보이 미트 걸>을 통해 본격적으로 트렌드 장르를 공략했다. 그러나 유머러스한 설정의 청춘 학원물은 너무나 많은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심혜진이 다시 도전한 트렌드 장르가 바로 <그녀석과 나>라는 만화다.

<그녀석과 나>의 설정은 트렌드 장르답게 상투적이다. 부유한 집의 첫째 아들 이수는 중학교 때 2년 유급한 나이 많은 고3으로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다. 상대역인 수안은 대학생으로 이수와 나이가 동갑이지만 아이돌의 공연을 쫓아다니는 조금은 철없는 인물이다. 아이돌 공연에 갔다가 사고를 당해 TV를 타게 된 수안. 짧은 순간이지만 모자이크 처리의 실수로 맨 얼굴이 화면에 나가고, 그 장면을 목격한 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수안은 어머니의 주선으로 친구 아들 이수를 가르치게 된다. 멋진 집, 우아한 엄마, 그리고 착하고 귀여운 미소년 동생. 수안은 행복한 상상을 하지만 실제로 만난 이수는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불량배. 그리고 이날부터 수안은 이수와 (만화의 카피를 빌면) ‘과외 배틀’에 들어가게 된다. 친해질 수 없는, 앙숙지간이 티격태격하다가 정이 든다는 친숙한 설정은 매우 진부하지만, 진부한 만큼 단순하게 독자를 설득한다. 상황을 단박에 이해하는 독자들은 심혜진의 현란한 개그 애드리브를 즐기며 웃고, 두 앙숙의 싸움을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석과 나>에는 깡패, 순진함, 돈 많음, 잘생김, 검은 피부를 두루 지닌 주인공이 나오며, 착하게 생긴 수완의 쌍둥이 동생 이나, 대학 제일의 킹카이며 수완에게 프로포즈한 흑발 미소년 수겸 등 잘생기고, 귀엽고, 개성있는 다양한 취향의 미소년들이 수시로 나와 칸을 빛낸다. 거기에 깡패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밉지만 정이 드는 남자 주인공과 달콤하면서 완벽한 킹카 사이에서 방황하는 ‘평범한 여자 주인공’이라는 삼각관계(이수-수안-수겸)와 이수를 쫓아다니는 귀엽고 예쁜 여고생과 이수, 수안의 삼각관계가 서로 밀고 당기는 긴장을 제공한다.

유쾌한 개그 애드리브

그러나 이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위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요소들을 처지지 않고 빠르게 개그 애드리브와 함께 풀어내는 심혜진 특유의 스타일이다. 독백과 내레이션이 스피디하게 교차하며 웃음을 이끌어내는 스타일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팬들을 사로잡은 <그 남자 그 여자>, 바로 그 스타일이 아니던가.

제목마저 묘하게 비슷한 <그녀석과 나>의 트렌드는 <그 남자 그 여자>와 교차하는 스피드와 웃음이다. 스피드와 웃음이 없다면, <그녀석과 나>는 결코 트렌드 만화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만화를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 <그 남자 그 여자>를 권한다. 가능하다면 TV에 <비밀일기>라는 해괴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도 함께 권한다. 안노 히데야키 감독의 <그 남자 그 여자>는 만화와 영상이 어떻게 조우하는가를, 그리고 청소년들이 즐기는 트렌드가 무엇인가를 잘 알려주는 매력적인 텍스트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