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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에서 오는 절망감, <텔 미 썸딩>
조종국 1999-11-09

흥건한 피와 토막난 팔과 몸뚱이, 동강난 머리… 엽기적인 연쇄 토막살인사건의 정점에 가냘픈 한 여자가 서 있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하다. 감성멜로 <접속>을 만든 그 장윤현 감독이 2년 만에 내놓은 영화는 ‘피 범벅, 사지절단’의 하드고어 스릴러. 게다가 뭇 여성 관객들을 설레게 하는 한석규와 정갈하고 수려한 마스크의 심은하까지 피바다에 뛰어들었다니, 뭔가 범상치 않은 이야기인 듯하지만 어떤 그림인지 쉽게 떠올릴 수 없다.

도입부, 토막시체를 발견하는 장면부터 보자. 세기말의 음울함이 배어 있는 서울, 카메라가 향한 곳은 화사한 진열대 사이로 롤러브레이드를 탄 직원들이 일렁이는 도심 대형 할인매장. 엘리베이터 안, 모두 무심하게 층수를 가리키는 숫자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이 한 꼬마는 엄마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를 자꾸 건드린다. 순간 엘리베이터 바닥은 피로 물들고, 찢어진 봉투 사이로 보이는 건 토막난 사람 머리. 엘리베이트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뒤이어 강변 도시고속도로 굴다리 안, 한강 둔치 농구장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막난 사체는 예고대로 하드고어다.

발견되는 사체마다 신체의 한 부위가 없는 엽기적인 살인사건, 엘리트 경찰 조형사가 수사에 뛰어들면 연쇄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스릴러 꼴을 갖춘다. 희생자 모두의 연인이었던 채수연이 전면에 떠오르고 채수연을 흠모하는 기연에게 수사망이 좁혀지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는 듯 하지만, <텔미썸딩>은 그렇게 싱겁게 끝날 영화가 아니다. 조형사와 파트너인 강력반 베테랑 오형사 등 수사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채수연 주변을 감싸고 있는 미스터리는 공포를 부채질한다. 작정한 대로 영화는 숨가쁘게 반전에 반전을 기도한다.

계산된 반전이 연이어 뒤통수를 때리지만 정작 <텔미썸딩>의 힘은 치밀하게 짜인 내러티브에서 나온다. 영화 전개를 따라가자면 스릴러라기보다 드라마에 가깝다고 해야 할 판이다. 여기에서, 채수연을 정점으로 살해되는 네명의 남자들과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 “단절에서 오는 절망감”을 드러내려 한 감독의 의도가 비친다. 조형사의 집요한 추적으로 채수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기억의 줄기를 찾아가는 것도 “대화와 소통의 단절에서 초래된 비극”을 뒤집어보겠다는 의도인 듯.

하드고어 스릴러의 칙칙함 대신 강렬하고 자극적인 색조를 살려낸 것도 효과적이다. 상당히 많은 밤장면조차 흑백 대비, 감각적인 색 사용 등으로 모던하면서도 때론 그로테스크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김형구-이강산 못지 않은 김성복-임재영 촬영·조명짝의 팀워크가 빛을 발한 것. 여기에 흥행메이커 조영욱이 매만진 클래식과 평크록을 오가는 음악은 영화의 완급조절에 크게 기여한다.

<텔미썸딩>은 ‘범강우석 사단’으로 분류되는 쿠앤씨필름의 <연풍연가>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이자 고별작이다. 구본한·장윤현 두 사람이 공동대표인 쿠앤씨필름은 이후 ‘쿠앤필름’과 ‘씨앤필름’으로 따로 제작에 나선다. 순제작비 22억원짜리, 장윤현 감독, 한석규·심은하 주연, 시네마서비스 배급 등 흥행조건을 모두 갖춰 개봉 결과에 영화계 이목이 쏠려 있다.

죽은 이의 솜털까지 클로즈업

특수분장-인조 사체

냉장고에서 발견된 잘린 인조 머리. 머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봐야 한다.

영화 <텔미썸딩>의 볼거리는 특수분장팀에서 만든 인조 사체다. 영상물등급위로부터 삭제를 요구받은 것도 실감나는 인조 사체 ‘탓’이 크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체는 채수연의 애인 세명과 흠모하는 기연 등 토막 시체 4구, 잘린 머리 2구, 토막난 부위를 끼워맞춘 머리없는 사체 1구 등 총 7구. 제작비용은 총 8500만원, 4개월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일부는 <큐어>의 특수분장을 담당했던 일본의 ‘비행선예술공방’에서 만들었고, 국내 제작팀은 <조용한 가족>의 특수분장과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의 미니어처 작업을 했던 ‘메이지’의 신재호씨. <텔미썸딩>의 사체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직접 보여주는데도 땀구멍, 솜털, 절단된 단면의 뼈와 근육 등 디테일이 훌륭하게 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에 나오는 인조 사체는 형상이나 피부조직의 질감, 입술의 잔주름, 눈썹 등까지 거의 완벽히 재현돼 있다. 실제 촬영에서는 일본에서 만든 사체가 정교한 면은 있으나 사실감이 떨어져 주로 신재호씨의 ‘작품’을 사용했다.

인조 사체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도 있다. 채수연의 세 번째 애인인 34살의 철학과 교수 권중현은 원래 시나리오에는 사체로만 등장하는 것으로 설정됐던 인물이다. 따라서 특수분장팀에서는 한 무명 모델의 얼굴을 본떠 사체를 만들었는데 촬영 도중 실제 권중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수정된 것. 졸지에 그 모델은 카메라 앞에 서게 됐지만 연기경험이 전혀 없던 터라 단 한컷을 찍기 위해 열번이 넘는 NG 끝에 겨우 OK를 받는 홍역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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