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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로메르를 만나다
2001-07-27

도덕의 사제, 철학적 연애담을 말하다

에릭 로메르는 10년이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여섯편의 도덕이야기 시리즈를 완결짓고 나서는 전작들과는 다른 세계 속으로 진입을 감행했다. 그의 다음 작품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한 이었는데, 로메르는 고전적 기품과 균제의 아름다움을 갖춘 이 시대극을 만든다는 게 스스로 아주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앞으로 자신의 창조적 노력을 오로지 이런 영역에만 바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건만 허락되었다면 과연 로메르는 그렇게 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하튼 더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고 그렇다고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지도 못하는 이런 프로젝트에 그는 실제로는 더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매우 혁신적인 또다른 시대극 <갈로아인 페르스발>을 끝으로 로메르의 영화는 친숙한 동시대 이야기로 되돌아왔고 그리고는 다시는 과도한 ‘일탈’을 시도하지 않았다.

과 <갈로아인 페르스발>을 만들었던 7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는 아마도 로메르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거의 유일한 일종의 ‘막간’(intermission)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를 제외한 로메르의 영화들은 동일한 테마와 동일한 방법론을 따르는 하나의 우주, 또는 단 한편의 영화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는 확실히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와 유사한 데가 있다. 오즈가 엄정한 형식주의 안에 가정의 문제를 포박한 일군의 동일한 홈드라마들을 마치 ‘두부 만들 듯’ 만들었다면 로메르는 감정 처리에 서툰 남녀의 미숙한 연애담을 통해 로맨틱한 상념과 도덕을 들여다보는 일군의 동일한 멜로드라마들을 반복적으로 만들어왔다. 오즈나 로메르나 자신의 영화 자체를, 다른 이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고유의 ‘장르’로 만든 그런 시네아스트들인 것이다.

동일한 테마, 동일한 패턴의 신선한 반복

주지하다시피 ‘로메르의 영화’라고 하는 하나의 장르 아래에는 ‘도덕이야기’(1962∼72), ‘코미디와 격언’(1980∼87), ‘계절이야기’(1989∼98)라는 이름들이 붙은 하위 장르들이 모여 있다. 이 하위 장르(혹은 시리즈)란 당연하게도 동일한 패턴이나 주제를 공유하는 몇편의 영화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예컨대 ‘도덕이야기’의 영화들은 하나 같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하고자 하는 여자가 이미 있는 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그녀로부터의 유혹이라는 만만치 않은 시련을 통과하다가 결국에는 우물쭈물하면서 유혹을 떨쳐버리고 본래의 연인에게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의 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의 하위 장르가 가진 이런 패턴은 그 안에서만 폐쇄적 회전을 하지 않고 다른 하위 장르로 삼투해온다. ‘도덕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남자들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덜 위선적이며 또 좀더 현명한 인물들이다. 바로 그런 여자들이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주체로, 스토리 중심에서 슬쩍 비켜서 있는 존재에서 스토리의 중심 인물로 이월해오면 그게 바로 ‘코미디와 격언’ 시리즈의 영화 하나가 된다. ‘계절이야기’도 앞선 시리즈의 인물과 그가 처한 상황을 빌려오긴 마찬가지다. 세 여자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여름이야기>의 가스파르는 ‘도덕이야기’의 남자주인공들이 직면한 시련을 반복하고 있고, 5년 전 피서지에서 만난 사랑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겨울이야기>의 미혼모 펠리시는 여름 휴가지에서의 로맨틱한 ‘사건’을 내심 기대했던 <녹색 광선>의 이혼녀 델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처럼 하나의 영화가 다른 영화와, 하나의 시리즈가 다른 시리즈와 겹쳐지면서 그 기본 패턴이 되풀이되고 또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 로메르 영화가 자아내는 신선함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것에 있다. 그래서 결코 완성되지 않고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그의 영화는 한편의 영화보다는, 그것의 시리즈 모두를, 그리고 그보다는 전편을 보기를 요구한다.

이른바 ‘로메르적인 영화’가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을 거슬러올라간다. 50년대 초반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쓰기 시작한 로메르는 앞으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킬 젊은이들이 당시 걷던 것과 별다르지 않은 길을 걷고 있었다. 50년대 그는 앙드레 바쟁의 품 안에서 시네필의 감성과 깊이있는 지성이 결합된 격조있는 영화 글을 썼는가 하면 몇편의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로메르가 첫 장편을 만들게 되는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다른 동료들이 영화사를 바꿔 놓을 데뷔작들을 내놓은 것과 똑같은 1959년이었는데, 그러나 그의 영화 <사자 자리>는 아쉽게도 자기보다 10년이나 어린 동료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데 비해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아주 미미하기만 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바캉스를 떠나지 못하고 파리에서 8월을 보내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로메르의 첫 영화는 어쨌든 로메르 영화의 전형적인 표식, 이를테면 어떤 장소와 일년 중 어느 한때에 대한 출중한 감각, 로케이션 촬영, 구두 언어에 대한 애정 같은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말하는 영화, 문학적인 영화

로메르의 영화가 널리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사자 자리> 이후로도 1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이 성공을 거두면서 로메르의 명성이 확고해질 때까지 말이다. 이 영화가 로메르의 인지도를 널리 넓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에 대한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적인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평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드…>가 지니고 있는 텍스트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굳이 이의를 달 수 없었지만 이 영화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그런 평자들이 보기에 68년의 여진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영화치고 <모드…>는 사회·역사적 컨텍스트는 배제한 채 너무도 태연하게 중산층의 탁상공론과 감정 투쟁에만 골몰하는 영화였다. <모드…>는, 그리고 로메르는 아무래도 ‘보수주의적’인 게 확실했다(로메르도 자신이 좌파가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로메르의 영화는 다른 면에서도, 즉 미학적으로도 보수적이었다. 누벨바그의 다른 동료들이 영화라는 것의 본질과 역사를 의식하며 영화에 접근했던 것에 비해 로메르의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의 영화는 ‘영화적’이라기보다는 분명 ‘문학적’이었다.

로메르의 영화에 흔히 ‘문학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가 ‘말하는 영화’라는 점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로메르의 모든 영화들은 인물들의 행동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로 진행된다. 로메르 영화들에서 가장 매혹적인 순간도 <모드…>에서 파스칼에 대해 논의하는 긴 시퀀스처럼 종종 인물들이 대화하는 가운데 나온다. 인물들이 하는, 끝없이 이어질 듯한 말들이, 어느 정도는 철학적이기도 한 토론들이, 대화의 지속이, 그리고 목소리의 톤과 억양이, 그들의 생각을 보여주고 그들의 성격을 드러내주며 그들의 행위가 되어주고 또 철학적인 사건을 만들어나간다. 이것이 어느 정도 문학적인 영향을 받은 것임은 로메르 자신이 밝힌 바 있다.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들에서 대화 속에 내용이란 걸 묻어두듯, 발자크의 열렬한 추종자인 자신도 자기 영화들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메르의 영화가 말하는 것을 순전히 오로지 문학으로부터만 배워온 것은 아니다. 그건 (유성)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로메르 자신의 오랜 숙고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오래 전부터 그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주 말하는 행위와 ‘말하는 영화’에 대해 다루었는데, “말하는 영화를 위하여”(1948)라는 글에서 언어는 단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ambience)이 아니라 캐릭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비주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논하기도 했고, 조셉 맨케비츠의 영화 <조용한 미국인>(1957)에 대한 리뷰에서 이 말 많기로는 로메르의 영화에 뒤지지 않는 영화의 언어 이용에 대해 적극 옹호하기도 했었다. 요컨대 로메르가 보기에 ‘영화적인’ 표현수단이란 결코 비주얼에 국한된 게 아니었고 사운드, 언어, 음성 같은 것은 비주얼에 대해 부차적인 요소들이 아니었다. 로메르 영화들에서 두드러지는, 일상 언어의 현존과 그 이유에 대한 세련된 감각들은 영화에 대한 그런 자신의 근본적인 사고의 결과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바꾸지 않는다, 그대로 따라갈 뿐

로메르 영화의 인물들은 우선적으로는 말하는 존재들이고 또 사고하는 존재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로메르 영화의 미묘한 구조적 리듬은 따라서 대화와 침묵, 또 한편으로 이동과 정지 사이에서 주로 생겨난다고 봐도 된다). 성배를 찾아 길을 떠나는 <갈로아인 페르스발>의 퍼시발이든, 아니면 끊임없이 디나르 해안 주위를 소요하는 <여름이야기>의 가스파르든, 무언가 감정적 결락을 내포하고 있는 그들은 물리적으로 이동하면서 ‘모험’과 마주한다. 그들의 앞에 놓인 모험은 흔히 어쩔 수 없이 같이 밤을 보내게 될 여자가 던지는 유혹의 손길에 응할 것인가, 혹은 매력적인 소녀의 무릎을 만짐으로써 나의 통제력을 확인할 것인가, 같은 로맨틱한 모험, 혹은 ‘내기’의 형태를 띤다. 그들에겐 이제 선택만이 남았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또는 선택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은 최종적으로 미미하나마 심리적인 이동을 확인하게 된다.

로메르의 영화는 분명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 즉 모럴리스트(moraliste)의 영화다. 하지만 로메르는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러하듯 어떤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과 감정 상태를 드러내려고 하진 않는다. 그는 신이 주재하는 이 세상을 바꿔놓기라도 하다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불경죄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듯한 리얼리스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영화의 인물들이 어떻게 말하고 또 어떻게 움직이며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를 섬세하게 따라갈 뿐이다. 또 그들이 지금 언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로메르 영화는 경이롭게도 매순간 철학적인 사건, 도덕적인 모험, 내밀한 욕망, 감정의 미세한 결을 보여준다.

까다로운 리얼리스트답게 로메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결코 삶의 미스터리를 훼손하지 않으려 유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모드…>의 이름 모를 주인공 남자가 일순간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내렸음을 자인하게 될 때처럼 낭패감을 맛볼 순간이든, 아니면 <녹색 광선>의 델핀이 희망의 징표로 ‘녹색 광선’을 실제로 보게 될 때처럼 축복을 맞이할 듯한 순간이든, 로메르는 그런 ‘최후의 순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가 여느 시퀀스를 끝낼 때 흔히 그러하듯 여기서도 그는 인물의 행동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컷을 해버린다. 그래서 로메르의 인물들은 패배감이든 아니면 심지어는 희망으로부터든 결정적인 ‘위해’를 입지 않는다. “영화란, 그리고 삶이란 하나의 ‘과정’이고 그 속에 놓인 미스터리일진대 누가 그것들을 제대로 끝낼 수 있단 말인가?” 로메르의 영화가 끝날 때면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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