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패럴리 형제의 깔끔한 로맨틱코미디, <날 미치게 하는 남자>
문석 2005-10-04

이 남자, 느낌이 좋다. 보스턴에서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린지(드루 배리모어)는 어느 날 자기 앞에 나타난 수학교사 벤(지미 팰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그동안 사귀던 남자친구들과 달리 벤은 친절함과 참을성도 있고, 센스와 유머도 갖추고 있는 너무 귀여운 남자다. 망가져버린 첫 데이트 날, 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에 감동까지 받은 린지는 그와 진지하게 사랑을 해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린지는 핵심을 찌르는 친구들의 질문을 너무 쉽게 간과했다. “뭔가 석연치 않아. 그렇게 괜찮은 남자가 왜 아직까지 이 연애시장에서 팔리지 않았을까?”

하긴, 린지가 벤과 사귀기 시작한 겨울철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혈 팬인 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봄이 다가옴에 따라 벤의 감춰졌던 ‘광기’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23년 전 보스턴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 가서 팬이 된 이후, 외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평생 관람권으로 11년 동안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경기를 한번의 빠짐도 없이 관람했을 정도인 벤의 진짜 모습은, 야구 시즌이 개막되는 4월부터 나타난다. 이제 벤의 뇌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레드삭스와 야구뿐이다. 린지는 벤과 함께 보조를 맞추려 노력하지만, 갈수록 자신보다 야구에만 열중하는 벤에게 실망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바로 옆에 앉은 여자친구가 파울볼에 머리를 얻어맞았는데도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레드삭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달콤한 파리 여행을 포기하는 남자와 어떻게 관계를 진전시킨단 말인가.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어바웃 어 보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쓴 영국 작가 닉 혼비의 자전적 이야기 <피버 피치>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이 영화는 미국에선 아예 <Fever Pitch>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그런데 축구팀 아스날의 팬으로서 23년 동안의 삶을 정리한 이 책과 <날 미치게…>의 관계는 야구와 축구라는 종목 사이의 차이 이상으로 멀어 보인다. 지구상의 어떤 곳이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가 주말이면 축구장에서 살다시피해 비슷한 숫자의 ‘축구과부’를 만든다는 영국의 상황과 비슷하겠나. 대신, <날 미치게…>는 <피버 피치>의 디테일보다 핵심만을 취한다. 그것은 닉 혼비의 말에 따르면 ‘고통으로서의 오락’에 관한 것이다. “지난 23년 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는 닉 혼비의 말은 “나는 왜 레드삭스의 팬이 됐을까”라고 자책하는 벤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들에게 아스날 또는 레드삭스는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패배 때마다 배신감에 증오하게 되지만, 결국 다시 애원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사랑의 대상이다.

<피버 피치>가 이렇게 스포츠와의 ‘피학적인’ 사랑에 집중한다면, <날 미치게…>는 그 사이에 사랑스런 여성을 끼워넣어 묘한 ‘삼각관계’를 만든다. 린지가 23년 동안 이어져온 벤과 레드삭스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펜웨이 파크 개막전 티켓을 보석함에 넣어 함께 관람하자고 ‘프로포즈’할 줄 아는 남자는 드문 법. 벤과의 사랑을 완성하려는 린지는 승진 경쟁을 위해 퍼부어야 할 시간까지 포기하면서 벤과 함께 펜웨이 파크를 찾고 레드삭스에 관한 책도 읽는다. 하지만 ‘절반은 성인, 절반은 소년’인 벤은 레드삭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고 린지는 지쳐간다. 게다가 벤이 야구장을 포기하고 린지의 친구 결혼파티에 간 날 레드삭스가 역사상 최고의 역전승을 거두면서 상황은 더 악화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소중한 것을 과감히 포기하지 않으면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긴, 사랑이란 자신의 것을 조금씩 버리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춰가는 과정 아닌가.

이 깔끔한 로맨틱코미디에서 패럴리 형제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로맨틱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서도 보는 이를 경악하게 하는 유머감각을 발휘했던 이들이건만, <날 미치게…>에는 인간의 육체가 발산하는 오물들도, 엽기적인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 벤이 린지의 토사물을 치우고 강아지의 이를 닦아주는 장면 정도만이 희미하게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여기엔 패럴리 형제가 시나리오에 관여하지 않은 첫 연출작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터. 이 영화는 전작들에서처럼 애증이 뒤얽힌 사람들의 관계를 유쾌하게 보여주지만, 리얼한 삶의 이야기에 가깝다. <날 미치게…>는 “경기가 펼쳐지는 동안, 나는 열한살짜리 꼬마가 되어버”(닉 혼비)리는 현대 남성들의 소년성과 성숙에 대한 가벼운 탐구이자, ‘남친이 게임에 푹 빠져 있어요, 어떡할까요’라는 여성들의 고민에 대한 경쾌한 답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날 미치게…>는 경우와 정도만 다르지, 현대의 커플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를 로맨틱한 스크루볼코미디 스타일로 녹였다는 점에서 패럴리 형제의 발전 또는 성숙으로 평가될 만하다.

이 영화의 또 하나 볼거리는 야구장면 그 자체다. 여기에는 실제 경기가 열리는 보스턴 펜웨이 파크의 모습뿐 아니라, 월드시리즈 4차전이 열린 세인트루이스 구장도 스크린 안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 하나. 패럴리 형제는 어떻게 지난해에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것을 미리 알고 펜웨이 파크에 카메라를 들이댔던 것일까. 사실, 애초 제작진이 레드삭스를 다루려 했던 것은 ‘밤비노의 저주’로 86년간 우승을 하지 못한 보스턴의 역사 때문이었다. ‘야구는 져도 사랑은 이뤄진다’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던 이들은 보스턴이 극적으로 우승하는 것을 본 뒤 급작스레 시나리오를 바꿔야 했다. 이런 극적인 상황 때문에 실제 레드삭스의 열혈 팬이기도 한 패럴리 형제는 “진주만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진주만>을 찍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