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소름>, 안무서운데 왜 무섭지?
2001-07-31

<소름>에는 산발한 귀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난도질당한 신체가 나뒹굴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놓고 보면 공포영화라고 불러야할 이유를 찾기 힘든 <소름>이 관객의 소름을 돋게 하는 건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류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빈민아파트의 주민들이 저마다 자신의 고통과 함께 거기서 벗어나려는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다. 어둡고 침침한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들끼리 마주칠 때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을 섬뜩하게 만든다. 뭔가 저지를 것 같은 조짐이 자꾸만 감지되고, 마침내 저질러졌을 때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단서는 핏줄을 타고 되풀이되어 내려오는 업이다. <소름>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의 사슬이 개인들을 얽어매고 조종하는 중세의 벽화 같은 그림 하나를 관객들의 머리 속에 완성시켜 놓고는 자기 소임을 다했다는 듯 홀가분하게 막을 내리는 독특한 영화다.

택시 기사 용현(김명민)이 새로 이사온 아파트 504호는 얼마 전에 화재로 살고 있던 소설가가 불타 죽은 곳이다. 30년 전쯤에는 남자가 옆집 여자와 눈이 맞아 부인을 죽이고 달아났다. 용현이 이런 내력을 알게 되는 건, 같은 층에 사는 주부 선영(장진영)과 가까와지는 것과 시간적 궤를 같이 한다. 선영은 매일같이 자신을 구타하는 남편을 우발적으로 죽이고는 용현에게 도움을 청한다. 둘은 함께 남편을 야산에 묻어버린다. 그 뒤부터 서로에게 한발씩 다가서는 둘의 모습은 요즘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 만큼 애틋하다. 둘의 대화는 사무적이라고 할 만큼 간결하고, 만남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나 시골 교외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파트 뒷마당에서 담배피는 선영을 난간 위에서 지켜보는 용현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길에 나와 용현의 차를 기다리는 선영을 비출 때 영화는 대다수 멜로 영화보다 훨씬 더 아련하게 둘의 감정을 그곳의 공기에 실어 전한다.

그렇게 둘 사이를 잘 연출해 놓고는 순식간에 깨버린다. 잔혹하게 표변한 용현을 그에게 내려오는 업으로 설명하지만, 여기서 조금 아쉽다. 선영을 사랑하는 만큼 의심하고, 버림받기 싫어서 먼저 잔혹해지는 용현의 내적 갈등을 좀 더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빨리 반전을 기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미련 없이 인간 사이의 희망의 끈들을 잘라버림으로써 <소름>은 자기만의 일관된 리듬을 구축한다.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윤종찬 감독은 <메멘토> <풍경> 등 이전에 단편에서 보였던 솜씨를 장편에서도 살려냈다. 장진영, 김명민 두 배우의 얼굴과 연기도 모두 인상적이다. 8월4일 개봉. 임범 기자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