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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의 손, 스크린을 어루만지다
2001-08-01

<엽기적인 그녀> 음악감독 김형석

바쁘다, 바쁘다 해도 이만큼 바쁠까. 작곡가 김형석씨의 작업실 겸 사무실이 있는 청담동까지 찾아가서 그와 대면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약속시간에서 한참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그를 기다리면서, 새삼 대중음악계의 ‘미다스의 손’, ‘스타제조기’와 같은 그의 유명세를 탓했다. 그런데 늦어서 너무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니 항의는커녕 이해가 앞선다. 심한 감기 때문에 병원을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연신 기침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음악 작업을 마치자마자 밀려 있는 가요음반 작업에 파묻힌 그는, 아파도 쉴 틈 없이 일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형석씨는 지난 10여년 동안 대중음악계의 내로라 하는 스타 작곡가였다. 김건모와 신승훈, 박진영, 엄정화, 박지윤, 유승준, 최근의 성시경까지, 그의 곡은 늘 가요계 톱스타들을 통해 인기차트 정상을 누볐고, 낯선 신인들을 단숨에 스타덤으로 끌어올리곤 했으니까. 한양대 음대를 다닌 그는 89년,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와 인순이의 <이별연습>으로 대중음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교 음악교사인 아버지와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를 두고, 어려서부터 큰 방 작은 방 할 것 없이 놓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길이었지만. 바탕이 클래식인 그의 장기는 신승훈의 노래처럼 피아노와 현악 선율이 끌어가는 애잔한 발라드다. 이런 스타일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면서, 발라드든 댄스든 젊은 세대의 구미에 맞는 선율을 뽑아내는 감각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한창 많이 할 때는 1년에 26장의 음반이 그의 손을 거쳐갈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영화음악은, 뜻밖에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들었던 재수 시절부터의 숙원이었다. 아직도 그 CD를 차에서 듣는다며, 그는 “사실 영화음악을 하고 싶어서 대중음악을 시작했다”라고까지 털어놓는다. 틈틈이 <스타가 될 꺼야> <겨울나그네> 같은 뮤지컬음악을 한 것도, 영화음악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대중음악을 10여년 이상 해오면서 “버릇처럼 하게 되는 부분도 생기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다”는 자각도 영화음악에 대한 꿈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할렐루야>, 두편의 음악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전체를 책임졌고 가장 감성이 맞는다는 점에서 <엽기적인 그녀>가 그의 첫 영화였고, 행복한 만남이었다. “제목 때문에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까 순수한 사랑얘기였다. 눈물흘리게 하는 게 아니라 코끝 시큰한 정도의 편안한 로맨틱코미디.” 그리고 ‘그녀’가 ‘견우’의 편지를 읽고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흐르는 메인 테마 <Love & Longing>이나 신승훈의 <I Believe>같은 피아노와 현악 선율 위주의 음악은 물론, 코믹한 장면에서는 비밥풍의 재즈, 극중극의 액션과 무협에 맞는 음악까지, 대중음악에서 못 해 본 장르를 두루 시도하며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즐겼다. 지금은 유승준, 터보 등의 밀린 작업과 뮤지컬 <구미호> 때문에 바쁘지만, 앞으로도 기회닿는 대로 영화음악을 계속할 생각이다. 젊은 기호에 맞춰 가야 하는 대중음악을 언제까지나 무리하게 고수하고 싶진 않다고. <풀 메탈 자켓> 같은 전쟁영화나 역사영화에서 깊이있고 장중한 음악도 해보면서 자연스레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래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다 죽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글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