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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보다 사랑을 택하다, 뮤지컬 <불의 검>
김현정 2005-10-21

10월2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333-4693

김혜린의 만화가 원작인 뮤지컬 <불의 검>은 무거운 짐을 몇 보따리나 짊어지고 시작했다. 창작뮤지컬로는 버거운 제작비, 지나치게 훌륭한 원작의 그림자, 서사와 감정을 압축해야 하는 정교한 손길. 그러나 <불의 검>은 욕심을 버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집중하려고만 한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몸부림치던 여인들의 한과 민족의 운명을 건 전투는 여기엔 잠깐의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가난한 아무르족 소녀 아라는 의식을 잃고 냇물에 떠내려온 남자를 건져내어 산마로라 이름붙이고 사랑한다.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한 두 사람은 지배자 카르마키족과 야장귀족 수하이 바토르의 침입에 생이별을 하고, 수하이의 여자가 된 아라는 철검 벼르는 기술을 익히며 살아남고자 이를 악문다. 그러나 산마로는 홀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버렸다. 아무르족 푸른용부의 수장인 가라한 아사로서의 기억을. 도망쳐나온 아라는 범접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아사 앞에서 지난 사연과 절박한 사랑을 마음속에 파묻으려 한다.

<불의 검>은 사랑의 이야기이나, 그 규모 때문에, 스펙터클한 무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작진은 비교적 현명하게 난제를 헤쳐나갔다. 바위궁과 신궁을 간결하게 세우고 조명이나 휘장으로 아우라를 더하는 식이다. 신궁에서 탈출하는 노예들의 합창과 옥에 갇힌 산마로가 아라를 그리며 노래하는 절창 또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가진 매력을 제대로 짚어내며 마음을 울린다. 그러나 영화 <비천무>가 실패했듯, <불의 검> 또한 서사를 맺는 데는 어설프다. 산마로가 기억을 회복하기까지, 원작의 초반부에 극의 대부분을 바친 <불의 검>은, 기억 잃은 연인을 바라보는 아라의 눈물이 어떤 역을 했는지 잊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