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지난 8년, 관객의 웃음이 가장 그리웠다”
2001-08-01

<엽기적인 그녀>로 돌아온 곽재용 감독 (1)

● <엽기적인 그녀>로 다시 관객과 만나기까지, 곽재용 감독에게는 적잖은 세월이 걸렸다. 의붓남매의 사랑을 수채화처럼 서정적인 영상으로 그려낸 멜로드라마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떠들썩한 감독 신고식을 올렸던 게 벌써 89년. 영상미가 돋보이는 이 청춘영화의 성공은, 단편영화와 <내일은 뭐할 거니> <깜동> 등의 연출부를 막 거쳐온 그에게 상업영화의 주목할 만한 신인이라는 느낌표를 달아줬다. 하지만 2년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휘말리는 청춘남녀의 여행을 담은 스릴러풍의 멜로드라마 <가을여행>으로 그는 이른 실패를 맛봤다. 전열을 가다듬고 93년에 전편의 캐릭터와 줄거리를 잇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2>를 내놨지만, 전편의 성공까지 이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8년. 영화를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액션영화인 <영웅의 이름으로>처럼 스쳐간 작품도 있긴 하지만, 끝을 보진 못했으니까. 그래서 요즘 20대의 경쾌한 연애담을 쏟아놓은 <엽기적인 그녀>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여전히 청춘들의 사랑이야기지만, 이미지보다 인물간의 에피소드와 드라마에 치중하면서 웃음이 많아진 신작. 관객 시사를 앞두고 씨네플러스 극장 12층, ‘견우가 그녀의 새 남자에게 그녀를 위해 지켜야 할 수칙을 들려주는’ 그 카페에서 곽재용 감독을 만났다. 사진기자의 주문에 자세를 잡으며 “어떻게 해도 폼이 안 난다”고 웃는 그는 “이것도 오랜만”이라며 못내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시사회 반응도, 개봉 주 예매 현황도 순항 조짐인데 아직 맘이 놓이지 않는다고, 일단 입을 열자 그는 할말이 참 많았다. 영화 없이 지나온 8년부터 카메라와 필름에 매료된 유년, 혼자 단편영화를 찍으며 영화의 꿈을 배양하던 시절을 거쳐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게 가장 그리웠다”는 고백까지.

+ 8년 만에 새 영화로 돌아온 감회가 어떤가. 지금은 물론 현장에서도 남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 극장에 개봉되는 영화는 8년 만이지만, 사실 4년 전에 <영웅의 이름으로>란 영화를 찍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50% 정도 촬영하고 여건이 안 좋아져 엎어졌지만. 특별히 오랜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현장에서는 시간과 제작비, 스탭들의 요구 등에 맞춰가며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에 설렌다든가, 어떤 감흥을 느낄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45회 촬영으로 끝내면서 참 빨리 찍었다. 하루에 70컷 이상씩 찍은 적도 있다. 예전 같으면 촬영 전에 배우들, 스탭들과 친해진 뒤에 시작하는데, 이번엔 캐스팅한 지 1달 만에 촬영에 들어가서 술 한잔 미리 같이 못 마셨다. 그래도 소설도, 시나리오도, 촬영도 정말 재밌었다.

+ 영화를 찍지 않는 동안 어떻게 지냈나.

= 쉴새없이 시나리오 쓰고, 계약해달라고 떼쓰고. 빚 얻어가며 살았다.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가끔 적으나마 시나리오료가 들어올 때도 있고. 한번 8년 동안 놀아봐라. 만약 지금부터 8년간 영화 못한다고 하면 그만뒀겠지. 이 작품 가지고 영화되겠지, 저 작품 가지고 영화되겠지, 그렇게 1년씩 가면서 8년이 됐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희망,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남아 있던 그 희망이 있었으니까. 8년 동안 그렇게 힘겹게 살아도 내색없이 견뎌준 아내가 참 고맙다. 성질도 별로 안 좋은 남편인데. 답답한 맘에 시나리오 쓰러 떠날라치면 아내가 돈을 마련해줬다. 그렇게 쓴 시나리오가 컴퓨터 안에 쌓여 있다. 난 창작욕이 굉장히 많다. 시나리오는 1주일, 소설도 열흘이면 1편 정도 쓴다. <엽기적인 그녀>의 초고도 5일 만에 쓴 거다. 화장실 가는 것 외엔 하루 종일 썼으니까. 지난해에는 데뷔 준비하는 후배들 시나리오도 2편 써줬다.

+ 활동이 뜸하던 터라 <엽기적인 그녀>를 만나는 데도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 같다.

= 원래 99년부터 SF멜로 <유리정원>이란 작품을 준비했는데, 캐스팅이 잘 안 되길래 신씨네에서 기획을 맡아주면 쉬워질까 하고 찾아갔다. <엽기적인 그녀>는 다른 젊은 감독이 하기로 돼 있었는데, 써온 시놉시스가 신씨네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을 권하길래 재밌게 읽었고, 시놉시스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쯤 <유리정원>을 이미 접은 상태였고, 내 시놉시스를 맘에 들어해서 시나리오 각색과 감독을 맡게 됐다. 캐스팅 과정에서는 내가 감독이라고 내세우면 어려워질까봐 감독을 숨겼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재밌다고, 감독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때 <비오는…>의 곽재용이다, 그랬다. 차태현도 그랬다지만, 대부분은 ‘어? 노땅 감독 아닌가?’ 했다. (웃음) 하지만 시나리오를 좋아들 했으니까.

+ 그러고보니 차태현, 전지현 두 배우가 감독님이 나이보다 참 감각이 젊다고 하던데.

= 젊다는 말이 싫다. 나이보다 젊다면, 이미 늙었다는 것 아닌가. 어리다고 하면 또 모르지만. (웃음) 생각하는 게 어리다. 어렸으면 좋겠다. <양철북>처럼. 고교 이후 키도 안 자라더니, 정신연령도 안 자랐나보다. 세월은 어쩔 수가 없어서 나이는 나이대로 먹지만.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면 자식들에게 바라는 게 많아지는데, 그런 게 별로 없는 편이다. 나한테는 아직 내 꿈이 있으니까. 무게 안 잡고, 속을 열어놓는 편이라 그렇게 말했나보다. 젊은 감각에 뒤처지지 않는 영화 만들 수 있는 감독이란 인식을 남길 수 있으면 만족한다. 신인감독 같은 느낌으로 여러 영화를 찍고 싶으니까. 관객도 많이 만나고.

+ <엽기적인 그녀>는 코미디로 슬쩍 비틀긴 했지만, 데뷔부터 지금까지 멜로드라마란 바탕을 고수해왔다. 특별히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나.

= 꼭 좋아한다기보다는 내 감성이 멜로드라마쪽인 것 같다. 멜로드라마 느낌 때문에 <엽기적인 그녀>가 <비오는…>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고. 과정은 다르지만, 라스트를 끝맺는 게 비슷하다. 시나리오 쓰다보면 멜로가 많은데, 특히 슬픈 감정을 아주 좋아한다. 좀 감상적인 데가 있다. 연애에 한창 빠져보고 싶은 사춘기 때, 연애도 못하고 발산을 못해서 그런가? 작고, 왜소하고, 여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인물이다보니 상상으로만 사랑을 많이 했다. (웃음) 지금도 그때 그 감정은 잘 찾아진다. 우는 연기하라고 하면 당장 할 수 있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보러 가면 슬픈 감정에 잘 빠져들곤 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김정훈이 우는 장면, 아빠랑 같이 밥을 먹고 싶다며 밥상을 엎는 걸 보고 집에 와서 따라했다가 엄청 맞고. (웃음) 사실 액션영화도 굉장히 좋아한다. <영웅의 이름으로>도 액션영화였고, 앞으로도 만들게 될 거다. 오우삼의 액션영화에서처럼, 형제간의 갈등이나 영웅이 가진 슬픈 느낌, 비장미가 좋다.

▶ <엽기적인 그녀>로 돌아온 감독 곽재용 (1)

▶ <엽기적인 그녀>로 돌아온 감독 곽재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