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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슬럼가의 악랄한 연대기, <시티 오브 갓>
오정연 2005-11-01

지옥의 끔찍함은 현재에 있지 않다. 오늘이 아무리 비루해도, 내일이 맑다는 희망이 있다면 견딜 수 있다. 모름지기 지옥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끝을 알 수 없는 순환, 안으로만 깊어지는 절망의 나선구조에서 비롯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바깥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 채 밑도 끝도 없는 타락을 거듭한 브라질 슬럼가, ‘시티 오브 갓’의 악랄한 연대기를 묘사한 <시티 오브 갓>은 그러한 지옥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제 막 빈민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1960년대. 마을을 지나가는 배달 트럭을 털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텐더 삼총사가 주름잡던 그 시기에는 엄연한 룰이 존재했다. 갱이라 부르기에도 뭔가 석연찮은 그들 모두는, 돈은 훔치되 살인은 삼갔고, 언젠가 이 생활을 그만두고 사랑 혹은 번듯한 미래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도 있었으며, 엉뚱한 용의자를 사살하고도 지갑을 챙기는 악질 경찰에 비하면 약자에 불과했다. 텐더 트리오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코흘리개 때부터 범죄에 탁월한 소질을 보였던 제빼게노(레안드로 피르미노). 그는 1970년대 초반, 큰 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마약을 다뤄야 함을 알게 된다. 그의 단짝친구 베네(펠리페 하겐센)는 악랄하기만 할 뿐 주변을 다독일 줄 모르던 제빼게노를 보좌하며 또 다른 룰을 만들어내지만 위태로운 평화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방치된 거리의 아이들은 점점 더 빨리 폭력을 규율로 받아들였고, 마약이 팽배한 도시가 최소한의 통제력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며, 무의미한 폭력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선한 이들까지 속속들이 합류한 야비한 전쟁은 절멸 직전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

<시티 오브 갓>의 진짜 비극은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꿈꾸던 이들 모두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있다. 순박했던 텐더 트리오도, 멋과 음악과 우정과 스타일을 중요시하던 ‘쿨가이’ 베네도, 어쩌다보니 전쟁의 중심에 서게 된 순박한 마네 갈리나(Seu Jorge)도, 심지어 악의 화신 제빼게노마저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다.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이들의 허무한 최후는, 비극의 시작이 개인이 아닌 사회와 구조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티 오브 갓의 폐쇄회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흥겨운 남미 특유의 리듬을 따라 뮤직비디오처럼 편집된 영화의 프롤로그. 누군가는 닭의 털을 뽑고, 누군가는 야채를 썰면서, 온 동네 사람들이 거나한 식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공포에 질린 한 마리 닭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닭의 리얼한 눈빛 연기를 따라 진행되던 숨가쁜 추격전은 갱단과 경찰의 대치상태로 끝을 맺는다. 무시무시한 총기를 손에 쥔 이들의 중간 지대에 끼어든 우리의 주인공 부스카페(알렉산드레 로드리게즈)가 중얼거린다. “시티 오브 갓에선 내빼도 죽고, 가만있어도 죽는다.” 딱한 상황은 닭이든 사람이든 그리 다르지 않다.

인상적인 프롤로그에서도 감지되지만, 빈민가를 바라보는 <시티 오브 갓>의 시선은 그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다. CF 연출로 경력을 쌓은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방대한 원작을 시대별, 인물별로 단락을 나누어 빠르게 편집해나간다. 1960년대 브라질의 리얼리즘 영화운동, 시네마 노보를 기억하는 일부 평론가들은 점프컷과 분할 화면, 극단적 렌즈를 사용한 앵글과 빈번하고 다양한 플래시백 등 가볍고 대중적인 스타일을 문제삼기도 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화법은, 거리의 리얼리즘이 엿보이던 <중앙역>보다는 중남미의 젊고 거친 사회분위기를 담은 <이 투 마마> <아모레스 페로스>에 가깝다.

메이렐레스는 이 영화를 제작한 가장 큰 목표가, 그 자신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좀더 많은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동명 원작 소설의 작가 파울로 린스의 성실한 시선, 빈민가 촬영과 캐스팅을 책임진 공동감독 카티아 룬드의 노련한 연기지도가 없었다면 메이렐레스 역시 그처럼 감각적인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의 현란한 비주얼이, 급박하게 진행 중인 현실의 짙은 그림자를 외면하거나 왜곡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제작자인 월터 살레스는, “정치적이긴 하지만 주장을 설파하지는 않고, 첨단의 영화적 기술을 사용하여 좀더 많은 대중에게 가까이 갈 만한 화법을 구사”한 것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꼽는다.

<시티 오브 갓>이 미국에서, 1년 가까이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고, 아카데미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제외한)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는 등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둘 무렵.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마틴 스코시즈의 <좋은 친구들>과 비교하곤 했다. 자신의 의지로 갱이 되었고, 그 선택의 결과 꽤나 오랜 기간 부를 누린 <좋은 친구들>의 주인공과 달리,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살기 위해 총을 들고, 무의미하게 죽어갔다. 심지어 “총에 맞아 죽기 싫어서” 경찰도, 갱도 되고 싶지 않았던 부스카페는 총이 아닌 카메라로 인정받기를 원했음에도, 또다시 전쟁터로 걸어들어가야 했다. 갱들의 좋은 시절을 찬양하는 <좋은 친구들>의 반어법은 영화 속 모두를 조롱하지만, 살기 위해 총을 든 이들의 모습을 그린 <시티 오브 갓>은 관객이 그들 모두를 염려하게 만든다. <시티 오브 갓>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갱스터영화의 걸작들과 같은 의미심장한 영화적 함의를 지니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두 영화 중 어떤 영화가 더 현실적으로 의미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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