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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음산한 꿈, <그림 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
김현정 2005-11-15

18세기 말 독일에서 태어난 야곱과 빌헬름 그림은 입으로 전해지던 민담과 설화를 채집해 동화책으로 엮어냈다. 그들의 책 <그림 동화>는 중유럽의 어두운 분위기를 품었고, 새들에게 눈알을 쪼여 장님이 된 신데렐라의 언니들의 후일담처럼, 비슷한 뿌리를 가진 <페로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다. 그러나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의 그림 형제는 역사 속의 형제와 비슷한 시기를 탐험하되, 그들 자신은 아니다. 심지어 형과 동생의 관계도 거꾸로다. <그림 동화>의 세계로 던져진 가짜 그림 형제는 창조자가 아니라 불가해한 미로의 방들을 헤매다니는 앨리스와 비슷한 존재일 뿐이다.

윌(맷 데이먼)과 제이크(히스 레저) 그림은 기계장치를 이용해 마녀와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퇴치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사기꾼 형제다. 어릴 적부터 동화를 믿었던 제이크는 학자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현실적인 윌은 돈과 명성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점령군인 프랑스 군대는 그림 형제의 사기행각을 눈감아주는 대신 마르바덴 숲에서 일어난 소녀 실종사건을 해결하라고 명령한다. 마르바덴 숲은 자신의 미모에 탐닉했던 여왕(모니카 벨루치)의 전설이 남아 있는 장소. 그림 형제는 열한명의 소녀를 삼킨 마르바덴 숲이 진짜 마법의 공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은 나폴레옹 군대의 원정길을 따라 자유주의와 계몽주의가 유럽에 퍼지던 무렵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다. 언제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에 매혹돼왔던 테리 길리엄은 “19세기 초반은 판타지를 향한 믿음과 계몽주의가 거대한 충돌을 일으키던 시기여서 흥미로웠다. 그 충돌은 이 영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 어디엔가 존재하는 신비한 힘, 마법을 믿음으로써 생겨나는 마술적인 세계. 그러므로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은 요정을 믿는다는 아이들의 목소리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 팅커벨과도 같은 영화다. 거울여왕이 지배하는 마술의 탑 안에서, 제이크가 자신이 모든 사건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문제는 전설을 믿는가이다. 거울여왕이 500년 동안 살아 있으며 마르바덴 숲이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눈앞의 단서들이 비로소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변화할 것이다.

길리엄의 전작인 <바론의 대모험> <시간 도둑들>처럼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 또한 천조각 몇개가 맞붙은 퀼트의 느낌을 준다. 길리엄은 마을과 숲을 지어올리는 수고를 감수하고, 마을 내부의 경사도까지 고민하는 세심함을 보였지만, 시나리오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한계가 많다. 나는 시나리오가 아닌, 일종의 드레스 패턴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훨씬 유연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은 어두컴컴한 숲속 폐허와 거울여왕이 라푼젤처럼 머리털을 늘어뜨리던 과거의 영광과 어린 소녀들이 하나씩 잡혀가는 단절적인 사건을 배짱좋게 흩어놓는다. 그러나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은 조각날 수밖에 없는 허풍선이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담이나 난쟁이들의 시간여행과는 다르게 그러한 구조를 취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어떤 필연이나 책임도 요구하지 않으며 도약을 거듭하는 요란스러운 꿈에 가깝다.

그 꿈은 산만하지만 아름답고 음산하다. 길리엄은 “전설은 언제나 세계가 두려움과 가장 어두운 이미지를 추방하고, 해피엔딩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라고 정의했다. 그림 형제는 개구리가 입맞춤을 요구하고 진저브레드맨이 큰소리치는 동화의 세계를 통과해, 마력에 포박됐던 소녀들이 아서 래컴의 요정 일러스트처럼 안개를 품은 듯 아련하게 걸어나오는 해피엔딩에 도달한다. 악몽으로 구축된 탑이 부서지고 햇빛 눈부신 낭만파의 들판이 펼쳐지는, 그 모든 동화의 길을,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도 따라가는 것이다. 다만 그 모든 동화를 다 녹이려 한 탓에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곁길로 새곤 한다. 빵조각을 뿌려 길을 찾으려는 헨젤과 그레텔, 한쪽 발에만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 동물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 공주의 변형, 거울 속에서 미로를 발견하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 케이크 바구니를 손에 든 빨간 두건 소녀, 탑 안에 갇혀 잠든 여왕. 만화경처럼,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찬란한 이미지들이 뒤섞여 춤을 춘다.

광기와 몽상으로 무장한 테리 길리엄은 이 차가운 시대에 버려진 전설을 찾아 홀로 떠돌고 있는 듯하다. 현실 속에서 노련했던 윌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동화를 쓰고 있던 제이크에게 이야기를 기억해내라고, 이곳은 너의 세계라고,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외친다. 그렇다. 마르바덴 숲은 테리 길리엄의 세계다. 처참한 비극으로 무산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찍으면서 직접 거인의 춤을 추며 즐거워했던 그는 화관을 쓰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윤무를 추는 아득한 풍경으로 뛰어들었다. 파랗게 얼어붙은 소녀들을 녹이는 왕자의 입맞춤을 선물했다. 현실에서 패배했으나 영화에서만큼은 신비로운 마술이 승리하리라고 손을 들어주듯.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안쓰러워 보인다.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허풍으로 세상을 유랑했던 뮌히하우젠 남작 테리 길리엄. 그는 너무도 많은 꿈이 무너져내렸기에, 이번만은 가능한 많은 꿈을 구겨넣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변화무쌍한 캐릭터의 성격, 나몰라라 내팽개치는 에피소드의 결말, 웃음을 주려 애쓰지만 부담스럽기만한 허식의 농담. 그것이 재능의 고갈이나 패턴의 반복이라기보다 누구나 한번쯤 빠지는 함정이라 믿고 싶은 탓이다.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혼돈의 영화 앞에서, 논리를 버리고 그에 휘말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한때 테리 길리엄의 혼돈이 그토록 매혹적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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