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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 청순남의 결혼 원정기, <나의 결혼원정기>
김도훈 2005-11-22

어느 인터넷 국제결혼회사에 따르자면, 우즈베키스탄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다. 1. 서류와 사진을 제출한다. 2. 프로필 열람 뒤 호감가는 여자를 선택한다. 3. 맞선을 위해 개인별 특성을 숙지한다. 4. 현지에서 예정된 여성과 맞선을 한다. 5. 마음에 들면 신부 부모의 허락하에 간단한 결혼식을 올린다. 6. 귀국 뒤 혼인신고를 하면 결혼비자를 받은 여자가 한국에 온다. 이 모든 과정은 회사의 철저한 관리하에 이루어지며, 우즈베키스탄 7박8일 원정에 성혼비를 포함해 모두 950만원의 비용이 든다. 이 모질게도 사무적인 절차는 <나의 결혼원정기>에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결혼 원정기가 아니라 ‘나의’ 결혼 원정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가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서른여덟이 되도록 몽정한 팬티를 몰래 빨아입는 농촌 총각 만택(정재영)이다. 어머니(김지영)는 환갑이 넘도록 살림살이에 시달리며 며느리도 못 본 인생을 한탄하고, 이를 보다 못한 할아버지(김성겸)는 만택에게 우즈베키스탄 결혼원정을 제안한다. 불알친구 택시기사 희철(유준상), 속살 뽀얀 처녀를 원하는 마흔여덟 두식(박길수)과 성공적인 원정을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러 가는 상진(전상진)으로 진용이 갖추어진 결혼원정단은, 이리하여 낯선 중앙아시아의 대지를 밟는다. 하지만 서른여덟이 되도록 한번도 못해본 남자에게 원정은 고역이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우즈벡 여자들과의 맞선에서는 실수만 연속이다. 만택의 통역과 맞선을 담당하고 있는 라라(수애)는 슬슬 애가 타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만택은 그런 라라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라라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만택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하는 연유는 따로 있었다.

기실 <나의 결혼원정기>가 등에 업은 소재는 한국사회의 어둡고 비루한 그늘이다. 결혼할 여자가 없는 농촌 총각들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신부를 사오기 위해 이국행을 결심한다. 물론 농촌이 순박한 이상향이 아닌 만큼 농촌 총각들이 만택처럼 순박한 청순남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9시 뉴스>는 정신병력에 여성노비론자인 농촌 남자에게 시집와 2년 동안 두들겨맞고 살다 도망친 필리핀 여성, 부농이라 속이고 데려온 20대의 우즈베키스탄 부인이 두달 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버려 절망한 50대의 늙은 농촌 홀아비를 비춘다. <나의 결혼원정기> 역시 20대 영계를 찾는 48살 두식과 물욕으로 점철된 결혼정보회사 사장을 통해 이같은 현실의 음영을 언뜻언뜻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결혼원정기>에 현실을 풍자하며 국제결혼의 그늘을 파헤치려는 본격적인 야심은 없다.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황병국 감독의 변처럼, <나의 결혼원정기>는 순박한 농촌 총각이 어쩌다가 결혼원정이라는 보기 드문 여정에 말려들어 생애 처음 사랑을 내지르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탈북자라는 사연을 숨긴 라라와의 로맨스는 투박하고 인공적이지만 울림이 크고, 잘 매만져진 대본은 한번의 덜컹거림도 없이 매끄러운 호흡으로 결말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보기 드문 장르영화적 매끈함은 배우들의 덕을 크게 입었다. 어수룩한 농촌 총각 역에 자신만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정재영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럽고, 발음 하나도 정확하게 곱씹어서 깊게 목으로 울려낼 줄 아는 수애는 조금 허술하게 쓰여진 탈북자 캐릭터에 피와 살을 곱게 입힌다. 하나 돈으로 신부를 사러간 농촌 총각들의 이야기라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로맨틱코미디의 마법과 배우들의 호연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아닌, 푸른 돔과 페르시안 타일의 비일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즈베키스탄은, 누추한 현실을 일순간 판타지의 무대로 변화시켜 관객을 기분 좋게 마비시킨다.

물론 <나의 결혼원정기>가 선사하는 달콤한 해피엔딩은 어쩔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멋진 정장을 입고 은행원으로 일하던 알로나(신은경)는 몸뻬바지를 입고 농사를 지으며 경상북도 벽촌에서 행복하게 살고있을까. 두식이 전라도 촌구석으로 데려간 스무살 어린 우즈벡 여인은 아직도 도망치지 않고 대머리 장사꾼과 오순도순 살고 있을까. 시골 기찻길 곳곳에서 나부끼는 플래카드들(‘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A/S 보장’, ‘가격저렴·도망 안 감·후불제’, ‘한국인과 혈통이 비슷한(몽고반점 있음)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은 그럴 리가 없지 않냐고 말한다. <나의 결혼원정기>는 억지로 해피엔딩을 강요하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모범적인 대중영화로서의 미덕을 기치있게 발휘하는 잘 세공된 장르영화다. 하지만 그것이 살짝 흘리고(혹은 가리고) 간 비루하고 못난 현실은, 원정기의 행복한 결말을 못내 아프고 쓰라리게 만든다. 모든 아름다운 동화의 후일담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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