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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칼럼] 백원도 저축해본 적 없는 여자의 전성시대는 오려나?

매일 사만팔천육백원 저금하는 그녀

서른을 넘긴지 오래됐으면서도 매일 사만팔천육백원은 커녕 백원도 저축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영재의 전성시대>에서 영재가 저금통장에 뽀뽀하는 장면이 제일로 부럽다. 나이는 들어가지, 돈은 없지, 그럴듯한 남편도 없고 집도 없는 나는 도대체 얼마나 간이 크길래 저금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냔 말이다. 그에 비해, 나이 서른도 안 되었을 때부터 매일 사만팔천육백원(왜 486인가에 대해서는 ‘사랑해’의 획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을 꼬박 저금하는 젊은 그녀들은 왜 그렇게 똑똑하냔 말이다.

돈 밝히는 여자가 드라마의 새로운 똑순이가 된 시대

‘돈 밝히는 여자’가 이 시대의 새로운 똑순이가 되고 있는 것은 드라마에서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전 같으면 ‘돈만 맑히는 여자’들의 부류는 부동산에 종사하는 유한 마담이나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마담뚜들, 혹은 신분상승을 위해 재벌 2세와 결혼하려는, 가진 건 남자들이 탐내는 몸뚱이밖에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돈들을 온몸에 발라가며 순순히 ‘돈만 밝히는 여자’ 부류에 속해 평민들의 박탈감을 자극하면서 별로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 긴장감을 드라마 속에 불러일으키곤 했다. 돈에 눈이 멀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가리지 않고, 돈 되는 일을 냄새 맡는 기관만 발달한 나머지 권력의 비호까지 받으며 어둠의 경제를 주물럭했던 그녀들은 한국 근대화의 폐해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오브제로 쓰이다 버려졌다.

그리고 돈 밝히는 정도로 보자면야 유한마담들에 뒤지지 않지만 ‘젖은 손이 애처롭다’는 사회적인 응원까지 받는 주부라는 직업도 있긴 하다. 남편이 가져다준 쥐꼬리나 벼룩의 간만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어 쓰는 주부들에게 경제관념과 돈 밝힘증은 콩가루 집안이 되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그렇게 계산기 두드려가며 가정을 꾸리고 목돈 만들어 돈을 불리는 여자들의 몫이었기에 아무도 그들의 돈 밝힘을 비난하지 못한다.

그녀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

그렇다면 여자들의 돈 밝힘의 역사에서 요즘 등장하고 있는 ‘돈 밝히는 여자’들이 새로운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 돈을 모으고 돈을 쓰느냐이다. 상류계급으로의 진입을 위해,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과외라도 시켜 자식을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남편 출세를 위한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을 밝히는 여자들은 이제 지겹다.

큰손처럼 쓰는 삼순의 언니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는 여자들이 멋져 보일 만큼 시대는 변했고,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여자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태도로 돈을 벌고 모으는 여자들의 모습은 그래서 억척스럽지만 구질구질하지 않다. 그녀들은 그야말로 개미처럼 벌어 큰손처럼 쓸 줄도 안다. 위풍당당 미스 김도 그랬고 삼순이의 언니도 그랬다. 위에서 쓴물이 나올 정도로 이꼴 저꼴 다 봐야하는 직장생활 견디며 저축한 돈을 턱 털어 자기만의 가게를 꾸미는 일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부디 영재도 싸가지 없는 사장 ‘엄중서’를 위해서 말고 자신을 위해 그 피 같은 돈을 쓰길 바란다.

그런데 여전히 사만팔천육백원을 저축할 돈이 없는 여자들은? 돈 밝히는 여자들의 전성시대가 왔듯이 백원도 저축해본 적 없는 여자들의 전성시대도 오지 않겠는가? 손해볼 것 없으니 한번 기다려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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