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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포커페이스의 비애, <브로큰 플라워>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

‘포커페이스’라는 말이 있다. 카드를 할 때 좋은 패가 들어오든 나쁜 패가 들어오든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에서 유래한 말이라는데, 흔히 무표정한 사람을 일컫는다. 영화배우 가운데 포커페이스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찰리 채플린과 쌍벽을 이뤘던 코미디 감독 겸 배우 버스터 키튼일 것이다. 키튼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대신 몸의 액션코미디를 만들어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포커페이스 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로 기타노 다케시가 있다. 기타노의 <소나티네>나 <하나비> 같은 영화는 기타노의 무표정과 잔혹한 상황 또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충돌로 이뤄져 있다. 기타노의 이런 스타일은 때로 공포와 충격을, 때로 폭소와 희열을 몇배로 증폭시킨다.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 또한 포커페이스의 또 다른 경지다. 중년의 피로가 쌓인 그의 얼굴은 우리 인생의 당황스러운 국면을 의인화시킨 결과 같다. <브로큰 플라워>의 빌 머레이를 문장으로 옮기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당신은 아시나요?

<브로큰 플라워>는 아리송한 결말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영화다. 미스터리를 동력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속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않으니 당연하다. 정한석 기자는 이를 ‘기표의 영화’라는 말로 해명했고, 김혜리 기자는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뿐이다, 라는 초라하지만 불가피한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을 거의 수학적으로 증명해내는 영화’라고 표현했다. <씨네21>의 지난 기사들을 찾아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브로큰 플라워>가 표정의 영화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 영화가 던지는 미스터리는 빌 머레이의 아들이 누구인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아들찾기 소동에 감춰둔 진짜 미스터리는 빌 머레이의 포커페이스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이다.

<브로큰 플라워>의 이상한 도입부. 함께 살던 여자가 떠나는데 빌 머레이는 그냥 TV만 보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아들이 있다는 말에도 그는 흔들리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과거로 가는 여행이 시작된다. 이 여행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그에게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인들이 있었고 다시 그들을 만난 빌 머레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계속될 때마다 남자의 무표정은 우스워진다. 그러다 여행의 막바지에서 빌 머레이의 얼굴에 감정이 되살아난다. 죽은 자가 그에게 잠시 슬픔이 머물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빌 머레이가 표정을 되찾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브로큰 플라워>의 엔딩 장면은 빌 머레이가 다시 도입부에서 보여줬던 포커페이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한다. 함부로 얼굴에 진심을 드러내다 상처주고 상처받던 과거가 현재 시점의 여행을 통해 반복된 결과 빌 머레이는 다시 희로애락을 지운 표정을 갖게 되리라는 예언. 평온을 가장한 중년의 포커페이스는 그래서 서글프다.

언제부터인가 포커페이스가 쓸모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세월이 깎고 다듬어서 그렇게 된 것이든,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이든 나이가 들수록, 사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그런 믿음을 갖게 된다. 꼭 포커페이스가 아니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친밀감과 경계심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표정 또는 웃음을 띠고 있지만 기쁨이 아니라 예의로 미소 짓는 표정, 그런 2∼3개 표정을 마스크처럼 갖고 다니다 필요할 때마다 번갈아 쓰게 된다. 어린 시절 감정을 숨기지 않던 얼굴을 찾는 것은 노인이 된 다음에나 다시 가능해지려나. 아마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면 사람은 누구나 포커페이스가 되거나 포커페이스를 활용하는 법을 익히게 되나보다. 이럴 때 사용되는 포커페이스는 꺾인 꽃(브로큰 플라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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