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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신기한 영화네! <나의 결혼원정기>

글로벌 시대, 국제결혼에 대한 변방의 판타지적 민속지 만들어낸 <나의 결혼원정기>

<씨네21>에서 다룬 <나의 결혼원정기>에 대한 대체로 호감어린 리뷰(김도훈), 그리고 제출된 불만(지고지순한 농촌청년에 대한 판타지, 전정윤)에 동의한다. 그래서 이 글은 영화의 상세 분석이라기보다는 <나의 결혼원정기>와 더불어 생각하게 된 몇가지 지점에 관한 것이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탈북자를 서사 속으로 한번 돌려 끌어넣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러니까 주인공 만택(정재영)의 할아버지가 경북 예천에서 목격했던 이웃집 며느리인 이주 여성은 백인으로, 한국인 시어머니는 그녀가 “우즈베키스트”에서 왔다고 소개한다. 그에 고무받은 할아버지는 만택의 국제결혼을 주선한다. 하지만 막상 만택과 그의 단짝친구이자 택시기사인 희철 (유준상)이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맞선을 보는 여자들은 그곳의 소수민인 고려인이다. 국제결혼 중매업자는 이를 “한민족 네트워크 프로젝트”로 둔갑시킨다. 하여간 이 프로젝트에 관여된 만택의 통역인 라라(수애)의 신원도 으레 조선인이려니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탈북자다. 이 영화는 경북 예천과 우즈베키스탄을 지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어디쯤엔가 북한이 괄호쳐진 채 들어 있다. 또 그보다 더 작은 숨겨진 괄호는 러시아다. 라라와 그녀의 동생이 러시아를 거쳐 우즈벡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예천은 농촌, 변방으로 그려지며 우즈벡은 세계지도 속에서 말 그대로 접힌 주름에 해당한다. 만택과 희철이 그곳을 발견하는 경로를 따라가자면 말이다. 우즈벡은 2장짜리 지도가 접히는 바로 그 지점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변방에서 유라시아 대륙 변방으로의 “원정”, 그리고 우즈벡에서 여자들이 결혼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것을 글로벌한 흐름으로 보면 “생존회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등장하는 국제적 엔터테이너와 그들 파트너들의 “상층회로” 이동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사스키아 사센, 김현미 저 <글로벌 시대의 문화 번역>에서 재인용, 23-24쪽). 역시 상층회로로 이동인 원정출산과도 전혀 경로가 다른 것이다.

또 이 영화는 <버스데이 걸, 2001>에 등장했던 러시아에서 온 우편주문 신부 나디아(니콜 키드만이 원어민처럼 러시아를 해낸다)와 영국 한적한 마을의 은행직원인 존과의 국제결혼 코미디 사기극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유사점은 둘 다 글로벌 시대 결혼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나의 결혼원정기>는 “한민족 네트워크” 결혼소개소가 제조하는 사기, 협잡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농촌총각, 탈북여성의 순정과 진심을 믿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정의 판타지는 현실 원칙의 절대적 명령과 일정한 낙차를 두고 구성되어 심리적 원칙으로 전환되어 핍진성과 설득력을 가지려 애쓰는데, 그 명령이란 두말할 필요없이 절실한 농촌남성들의 결혼난이며, 세계 주변부 지역 여성들의 결혼시장을 통한 이주다. 또 한편으로는 전정윤이 예의 글에서 토로한 바, 헌신적이지 않은 도시남성들에게 질린 도시여성의 딴마음 품기다.

남남북녀의 ‘사랑의 조건’

그러나 이런저런 생존회로와 우회로를 통과해 이 영화가 건드리고자 하는 핵심적 판타지는 ‘남남북녀’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며 이해, 심지어 사랑과 결혼에 이를 수 있는가이다. 영화의 로케이션 원정은 우즈벡으로 갔지만, 실제로는 탈북여성의 마음의 지도를 상상해내고 얻으려는 것이다. 이런 남남북녀 판타지의 무결점성을 위해 영화는 우즈벡이라는 제3국을 택하며, 남과 북의 차이를 뚜렷하게 가시화시키는 물질적 가치, 시장의 교환가치 및 섹슈얼리티 등을 배제시킨다. 라라는 만택의 궁핍을 알아보며 만택은 라라의 곤궁을 알아본 후, 그렇다면 상대의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를 살핀다. 우즈벡보다 한국의 국가 부의 축적이 많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국제결혼이라는 고안이 없었더라면, 탈북과 농촌문제가 없었더라면, 만남의 기회가 희소했을 두 사람은 위의 외부적 조건을 최소화하면서 개인적 사랑의 조건을 만들어 나간다.

영화가 38세 남자의 몽정과 사후 팬티 세탁으로 시작한 데 비해 이후 만택과 라라는 손 한번 잡지 않는다. 그리고 제법 솜씨 좋은 바람둥이인 희철의 성적 접근도 불발로 끝난다. 영화에서는 몽정과 전희만 등장하지만 농촌에서 살게 된 우즈벡 여성들(이웃 백인 여자와 희철의 파트너인 알로나(신은경))은 이상하게도 임신 중이다. 두명의 다른 우즈벡 여성이 한국 농촌에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어머니 위치로 자리매김된다. 나도 잠깐 이 영화의 노선을 따라 우회하자면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여기에 얼마나 적합한 서사적 모태와 이해를 제공하는가? 다른 세상에서 온 여자를 국지화, 지역화하기 위해 아이 셋을 낳도록 하는…. 반면 라라는 예순이 넘은 만택의 어머니와 닮은꼴로 이 판타지의 퍼즐조각으로 들어온다. 만택은 희철에게 라라를 우리 어머니 같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만택이 엄마를 자신에게서 찾아내거나 말거나… 수애가 연기하는 라라는 한편으로는 하위 주체인 이산 여성이 갖게 된 경계를 넘은 자의 결연함과 지혜, 일상의 다급과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 다중언어 능력과 통역을 하며 오히려 습득하게 된 비언어적 기호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 등을 몸의 언어로 바꿔 기가 막히게 구사한다. 예컨대 만택의 호감을 느끼고 자신도 그에게 호감을 가진 채, 만택의 구멍 뚫린 구두를 수선하러 시장에 데려가 포도를 먹으며 다리를 흔들면서 조선어와 우즈벡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섭씨 50도가 넘었다는 촬영지 타슈켄트에서 대단히 근사하고 쿨한 연기를 펼치는 그녀는 사실 만택을 거의 힛맨(하수인)처럼 부린다. 여권 검사를 피하기 위한 라라의 요청으로 소매치기로 둔갑해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역시 찜통 같은 도심을 뛰어다니는 정재영의 만택은 그야말로 실종 위기에 처한 남쪽 남자의 ‘순정적’ 모습이다.

국제결혼에 대한 변방의 판타지

<나의 결혼원정기>는 남남북녀 커플이 만들어지기 위해 건너야 할 강과 넘어야 할 산을 보여주면서 분단과 자본의 폭력 및 꼬임을 넘어서는, 둘 사이에 등가로 견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와 그를 측량할 수 있는 잣대들을 은연중에 만들어낸다. 둘 사이의 궁극적 유사성은 타자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을 선용하는 것이다. 만택은 라라를 위해 말 그대로 죽어라 뛰며, 라라는 신원 발각을 무릅쓰고 만택을 결혼사기극과 경찰 검문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쓴다. 우즈벡이라는 제3국을 등장시키고 남남북녀만이 아닌 다른 커플들을 배열함으로써 위의 정치적 무의식이 덜렁하게 남북 긴장, 화해 모드의 알레고리를 제공하는 대신 당대 다민족 한국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수용되게끔 구성되어 있다. 즉, 단일민족국가로 남한을 그려내는 대신 다민족국가로 전제한 뒤 러시아와 우즈벡에서 삶의 경험이 있는 탈북자 여성을 한국사회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방향이 다소 촌스러운 몽타주―특히 마지막 시퀀스, 만택은 매화꽃 만발한 농장을 달리고, 그와 교차편집되는 것이 독일대사관의 문을 넘는 라라의 모습이다―및 비계산적 절대순수에 대한 소박한 믿음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호감을 갖게 되는 연유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으나 정말 둔감하고 거슬리는 유머는 우즈벡어로 “다시 만나자”라는 뜻이지만, 한국어로는 형편없는 마초적 발언이 되는 “자빠트려”의 남용이다.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로 자빠트려!를 상당히 여러번 외치는 장면에서는 아이러니도 아니고 블랙유머도 아닌 진심이 담겨 있기에 정말 당황스럽고 불편하다. 반면 영화의 초반 우즈벡 여자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한국여자들이 농촌남성들에 보여주는 냉대에 비하면 오히려 우즈벡 여자들은 마음을 열고 들어준다는 대답에 설득력이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다민족, 소수민족 타자에 관한 시각은 이렇게 비균질적인 여러 요소를 얼기설기 엮어내어 글로벌 시대, 국제결혼에 대한 이종, 변방의 판타지 민속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영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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