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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햅스 러브> 홍콩 프리미어 [1]
문석 2005-12-22

홍콩의 첫인상은 차라리 거대한 영화세트장이었다. 비좁은 도로, 낡은 고층건물, 하늘을 어지럽게 가리고 있는 간판들, 그리고 분주히 오가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사람들까지, 이 모두가 어떤 영화에서라도 봤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캔톤로드에 서면 장만옥을 뒤에 태운 여명의 자전거가 달려올 것 같고, 비계로 둘러싸인 건물에선 크리스 터커와 성룡이 승강이를 벌일 듯하며, 허름한 국수집에서는 유덕화와 장학우가 국물을 들이켜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 여긴 정말 홍콩영화 속인 것이다. 하지만 ‘쇠락’이나 ‘침체’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요즘 홍콩영화의 위상 탓인지,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 또한 세피아 톤 필터가 끼어 있는 듯 갑갑하다.

12월6일 홍콩에서 프리미어 행사를 가진 진가신 감독의 신작 <퍼햅스 러브>는 이처럼 기억의 동굴 안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홍콩영화의 옛 영화(榮華)를 되살리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고 내년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에 홍콩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출품된 이 영화의 제작비는 1천만 달러에 이른다. 꾸준히 하락해온 홍콩영화의 위상을 고려하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괜스런 걱정이 들기도 한다. 대만의 금성무, 홍콩의 장학우, 중국의 주신, 한국의 지진희 등 아시아권의 스타들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게다가 뮤지컬이다. 프로듀서 안드레 모건의 입을 빌리면, <퍼햅스 러브>는 “35년 만에 만드는 중화권 뮤지컬영화”다. 아주 엄밀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뮤지컬영화를 찍는 과정을 담는 멜로드라마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영화 속 영화의 노래들이 캐릭터의 생각과 내면까지 전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영화를 뮤지컬 범주 안에 집어넣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현란한 군무 속, 직설적인 러브스토리

<퍼햅스 러브>의 주인공은 세 남녀다. 이들이 이루는 삼각관계의 꼭지점에는 중국의 스타급 여배우 손나(주신)가 있다. 그녀가 떠나온 과거에는 지엔(금성무)이 있다. 10년 전, 두 사람은 베이징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이. 영화감독을 꿈꿨던 지엔과 밤무대 가수였던 손나는 서로를 보듬어주던 가난한 연인이었다. 하지만 몸뚱이 하나로 세상을 헤쳐온 손나는 사랑의 낭만보다 더러운 세상의 셈법을 먼저 깨치고 있었다. 신분상승이라는 욕망에 솔직했던 손나는 지엔을 버리고 자신을 여배우로 키워줄 수 있는 남자를 향해 몸을 던진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손나의 현재에는 잘나가는 영화감독 니웨(장학우)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연인 사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듯 냉랭한 공기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상하이에서 만난다. 니웨가 연출하는 뮤지컬영화에 손나와 함께, 홍콩의 대스타 배우로 변신한 지엔이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옛 연인을 잊지 못하던 지엔은 손나와의 과거를 되새김질하지만, 손나는 지엔을 외면하려 애쓴다. 니웨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영화를 찍으며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질투의 불꽃에 휩싸인다. 지진희는 천사 몬티 역할로 등장한다. 몬티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는 임무를 띠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는 세 남녀 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잊고 있는, 또는 잃고 있는 것을 일깨워주려 한다.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멜로드라마를 이끄는 첫 번째 힘은 당연히도 뮤지컬적인 요소다. <쓰리> <성원> <파라파라 사쿠라> 등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피터 캄의 아름다운 멜로디도 귀와 마음을 붙들지만, 인도 발리우드 출신으로 <몬순 웨딩> <베니티 페어> 등에 참여했으며, 앤드류 로이드 웨버로부터까지 호출을 받고 있는 세계적 안무가 파라 칸의 현란한 군무가 시야를 활짝 열어놓는다. 게다가 영화 속 영화가 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하는 까닭에 시각적인 자극은 배가된다. 진가신 감독은 “홍콩과 아시아의 경우,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기보다 DVD 등으로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늘어가는 추세다. 꼭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무감을 느꼈다”며 뮤지컬영화 제작 동기를 설명한다.

그런데 <첨밀밀> 이후 8년 만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러브 레터> 이후론 6년 만에 선보이는 진가신 감독의 이 멜로드라마(멜로적 감성의 호러영화 <쓰리- 고잉 홈>(2002)이 있었지만)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느껴진다. 그건 그의 말대로 ‘성숙한 현재의 사랑이야기’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매우 직설적인 노래가사 탓이기도 한 듯하다. 영화의 중반부, 니웨는 손나와 지엔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영화 속 액자영화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네가 날 배신해? 다 알고 있어! (…)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지. 나 없이 넌 아무것도 아냐.” 진가신 감독에 따르면, 뮤지컬은 “직접 말로 하면 거북스러울 대사를 노래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주인공들의 내면은 노래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그 감성의 진폭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액자 구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퍼햅스 러브>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긴장감은 액자 구조에서 나온다. 이 세 사람이 찍고 있는 영화의 배경은 서커스단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또한 세 명인데, 손나가 맡은 역할은 기억을 잃은 채 서커스 단장에게 구출된 뒤 연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자오유이고, 지엔은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전 자오유의 애인이었던 장을 맡는다. 여기에 한 배우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감독인 니웨가 직접 서커스 단장 역할을 연기하기로 하면서 거의 비슷한 구도의 두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이제 영화는 액자영화 안팎을 오가며 진행된다. 이들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는 액자영화 안으로 들어가면서 스스럼없는 감정 폭발로 이어진다. 진가신 감독 특유의 현란한 편집은 두개의 세계를 절묘하게 연결해놓으며, 이 가운데는 일종의 트릭도 포함된다. 특히 막판에 니웨가 액자영화의 결말 대목 시나리오를 바꾸기로 하면서 긴장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퍼햅스 러브>는 <첨밀밀>의 추억을 아련하게 간직해온 진가신 감독의 팬에게는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특유의 촉촉한 감성 표현과 빽빽한 사람들 간의 관계 묘사는 여전하지만,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뮤지컬, 그것도 스펙터클을 강조한 초대형 규모의 영화라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진가신 감독이 아니었다. <퍼햅스 러브>를 기획한 사람은 미국 출신 프로듀서 안드레 모건(Andre E. Morgan)이다. 70년대 초부터 80년대까지 홍콩 골든 하베스트에서 일하면서 이소룡을 서구에 알리는 데 공헌했고, <캐논볼> <미스터 마구> 등 할리우드영화에 참여했던 그는 1994년 <금지옥엽>을 보고 “좋은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가진” 진가신 감독과 만났다. <대부>의 프로듀서인 앨버트 루디와 함께 루디 모건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진가신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을 돕기도 했다. “아시아 관객들을 상대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예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중국어로 된 뮤지컬을 오랫동안 꿈꿔왔다. “하지만 진가신 감독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꿈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그는 진가신 감독을 독려하고 협력하면서 <퍼햅스 러브>를 제작했다.

아시아를 향한 진가신의 새로운 도전

진가신 감독이 모건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러한 도전을 감행했던 건 아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홍콩영화산업의 어려운 사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홍콩영화가 비슷한 장르의 작품들만을 답습하면서 서서히 퇴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홍콩영화는 기존 시장의 기반이었던 타이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까지 잃으며 위기에 처했다. 이 캄캄한 상황에서 등장한 불빛은 중국 시장이었다. 중국 영화시장이 서서히 개방 바람을 타면서 홍콩영화가 쌓아왔던 경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조건은 있었다. “13억 인구의 중국 사람들이 왜 홍콩 배경의 영화를 보겠나. 결국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퍼햅스 러브>가 베이징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나, 커다란 스펙터클에 의지한 러브스토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들어 감독보다는 <디 아이>나 <쓰리> 시리즈 등의 제작자로 더 활발하게 움직여온 진가신 감독의 비즈니스 감각은 일단 적중한 듯 보인다. 12월2일 중국에서 개봉한 <퍼햅스 러브>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는 개봉 주말 사흘 동안 1500만 위안(약 23억원)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퍼햅스 러브>의 흥행파워는 12월9일 개봉하는 홍콩을 비롯, 중화권을 중심으로 폭발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진가신 감독은 12월7일 한국 기자들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 과거의 사랑법과 현재의 사랑법이 큰 차이를 보이는데, 지금의 사랑법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묻는다는 의미에서 <퍼햅스 러브>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말했다.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사랑이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 나올 홍콩영화에 대한 사랑법은 어떤 모양새를 갖게 될까. 내년 1월5일 한국에서 개봉하는 <퍼햅스 러브>는 앞으로 나올 새로운 홍콩영화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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