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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딱하게 보기] 직관은 시스템을 이긴다, <블링크>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

2000년 미국에서 2억5천만달러를 투입하여 대이라크전 모의훈련을 진행했다. 미군인 청팀은 고성능 위성과 슈퍼컴퓨터, 모든 정보와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첨단 프로그램까지 사용하여 이라크군인 홍팀을 압박했다. 당연히 청팀이 이겨야 하는 시뮬레이션이었고, 실전에서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훈련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방해전파를 통해 홍팀의 지휘체제와 관제시스템을 무력화했지만 폴 라이퍼 중령은 수공업적인 명령 전달과 조명을 이용한 비행기 이착륙으로 별 문제를 겪지 않았고, 청팀의 함정 십수척이 침몰되었다. 결국 폴 라이퍼 해병 중령이 지휘한 홍팀이 승리를 거두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블링크>란 책을 통해 말한다.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홍팀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등등 청팀한테는 모든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청팀은 정보를 분석하고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을 실행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홍팀의 라이퍼 중령은, 정보가 들어오는 동시에 판단하고 군대를 움직였다. 청팀이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이미 상황은 바뀐 뒤였다. 첨단 무기와 시스템보다는 빠른 결정과 행동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은, 빠른 판단과 결정이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고 말한다. ‘블링크’는 ‘누적 지식을 통한 통찰’이다. 많은 경험을 통해 지식을 쌓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직관을 키우는 것. 당장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당장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알려주는 통찰력. <블링크>란 책은 흥미진진한 사례를 통해 블링크가 대체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블링크가 왜 지금 필요한지 힌트를 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흘러넘치고,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블링크는 살아남기 위한 ‘감각’ 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 사냥을 할 때, 자연스럽게 사냥꾼의 몸에 체득되는 생존과 추적의 기술들처럼.

“나는 우리 자신과 우리 행동을 이해하려면 눈 깜짝 하는 동안의 순간적인 판단이 수개월에 걸친 이성적인 분석 작업만큼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을 다니면서, 지루한 회의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의사결정과정에 치어본 적이 있다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인 분석이란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왜 결국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사안일주의로 빠져버리는지를. <블링크>는 21세기에 딱 맞는, 아주 핵심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이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홍팀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뒤, 미군 고위층은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퍼 중령의 ‘블링크’를 도입한 대신 철저하게 자기들이 만든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두 번째 훈련이었다. 홍팀은 시나리오대로, 그냥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결국 시스템은 유지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블링크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대체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