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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인연을 챙기는 법
오정연 2005-12-23

휴갓길 터키의 지방도시 파묵칼레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만난 지 5분도 안 돼 “내 딸이 되어 함께 살지 않겠니?”라고 물었다. “아내도 자식도 없는 내 인생에도, 문젯거리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누군가의 문젯거리가 되는 것엔 늘 자신있는 나는, 떠나는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 마지막 장난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터키에서 만난 모든 이들처럼, 나도 그 순간 낯선 길 위에 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터키에서 이집트까지 여행한다는 씩씩한 한국인 자매, 여행길에서 만나 동행 중이라는 이탈리아 청년과 호주 아저씨, 지칠 줄 모르는 기세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일본 아가씨…. 그곳에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배낭여행객들이 야간버스를 타고 오가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알고 있다. 그 할아버지는 받아들여질 리 없는 농담을 던졌을 뿐이다. 누군가의 실없는 농담에도 울컥 마음이 흔들리지만, 새로운 인연에 대한 설렘은 그로 인해 놓치게 될지 모르는 인연을 향한 염려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선택할 수 있는 인연보다는 잊혀지는 인연이 문제였다. 초등학교 때 하루라도 수다를 떨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던 친구는 지금 소식도 모르고, 중학교 때 나보다 10년의 세월을 더 살았음에도 나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해주던 소중한 편지 친구의 편지들은 어느 구석에 처박혔는지도 모르겠다. 극진한 마음이 그저 고맙기만 했던 첫 번째 남자친구는 풀네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고, 대학 시절 세상의 마지막 밤처럼 술잔을 기울였던 선후배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소식을 전해 들을 뿐이다. 좀더 시간이 지나니, 절로 멀어진 마음보다 언제나 곁에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을 증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마음도 문제였다. 한달 전에는, 1년 가까이 술을 사달라 문자를 보내왔던, 언제고 쇠털같은 날들 중 하루를 잡아 자리를 함께하겠다 마음만 먹었던 후배가 사고로 세상을 떴다. 나는 그를 아끼는 후배라 믿었는데, 그 믿음에 대한 증거는 근 1년 안에 전무했다.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 찾아왔다. 그 모든 지워지고 잊혀진 인연도 모두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생면부지의 터키 할아버지 곁에 겁도 없이 남아볼까 상상했고, 이름도 모르는 동행인의 고향과 여정을 그처럼 궁금해했던 나는, 옆에 없다는 핑계로 소중한 이를 그냥 그렇게 놓아버렸다. 간직할 수도 있었던 기억들을 기꺼이 지웠다.

옆자리 선배가 지난 회의 시간에 폭탄선언을 했다. 내년이 되면, 오랫동안 한곳에 내렸던 뿌리를 거두고 다른 길에 서겠다고.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실 그 선배를 처음 만난 지 고작 2년도 안 된다. 선배의 기억에 나는, 지겹도록 “배고파요”를 남발하고, 언제나 원고를 고쳐줘야 하는 골치아픈 후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같은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고 영영 만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 선배가 옆에 없어도 마감은 무사히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남은 2005년 내내 나는 화를 내며 서운해하고 슬퍼할 것 같다. 갑작스런 통보를 던지고,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선배를 향한 투정이라 믿고 싶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소중한 인연을 소중하게 지키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12월은 이제 중순인데, 한해는 이미 어둡게 져버린 느낌이다. 알뜰살뜰 인연을 챙기는 법을 이제는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