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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잭슨의 걸작 <킹콩> [2]
김도훈 2005-12-26

연인 vs 부녀

피터 잭슨의 <킹콩>이 종의 경계를 벗어난 로맨스를 구현해내는 방식은 아예 로맨스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33년작과 76년작은 ‘미녀와 야수’의 성적인 서브텍스트를 잔뜩 지니고 있었다. 33년작에서 콩은 대로우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서 냄새를 맡고, 76년작의 콩은 제시카 랭을 폭포수에 목욕시킨 다음 다분히 변태적인 눈초리(콩의 탈을 뒤집어쓴 특수분장가 릭 베이커의 눈초리)로 몸매를 감상한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킹콩>은 대로우과 콩 관계에 숨어 있는 성적인 함의를 피해간다. 잭 블랙의 표현에 따르면 “여배우를 자기 크기로 확대해서 범하고 싶어하는 발정난 젊은 숫고릴라” 같았던 이전의 콩과는 달리, 잭슨의 콩은 지치고 외로운 늙은이에 가깝다. 이빨은 빠지거나 삭아서 비뚤비뚤하고, 털은 바래서 헝클어져 있으며, 온몸에 상처자국이 가득한데다 뱃살은 애처롭게 출렁인다.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영화는 거대한 고릴라들의 뼈무덤을 종종 보여준다)인 그는 온갖 적들이 득시글거리는 섬에 홀로 남겨져 생을 마감할 존재다. 그리고 대로우가 등장한다.

거대한 남성의 손과 금발의 미녀에게서 성적인 서브텍스트를 온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동각본가 필리파 보옌스의 말처럼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성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만남에 대한 영화다. 오랫동안 그 어떤 동반자도 없었던 생물에 대한 영화”다. 나오미 왓츠는 둘의 관계를 “서로에 대한 의존증(Codependency)”이라고 말한다. 겁에 질려 있던 대로우는 거의 본능적으로 콩의 외로움을 짚어내고 벌레스크 배우답게 춤과 저글링과 재주넘기로 그의 환심을 산다. 대로우에게도 콩은 꼭 필요한 존재다. 콩은 대공황의 거리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대로우의 퍼포먼스에 처음으로 충만한 관심을 기울여준 유일한 관객이며, 위험한 존재들로 득시글거리는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보호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동시에 대로우는 콩을 껍질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콩은 대로우를 껍질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래서 콩이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와 흡사한 자세로 미끄러지듯 추락하는 비극의 순간, 앤이 뒤쫓아온 드리스콜의 가슴에 안기는 것은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오히려 외로운 아비와 수양딸로 구성된 유사가족이 무너지는 순간으로 느껴진다. 혹은 거대한 애완동물과 홀로 남은 여주인의 결연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단순히 몸집과 종이 다른 남과 여의 로맨스였다면 이토록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콩이 “아름다워”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대로우에게 건네는 순간은, 외롭고 쓸쓸한 야생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콩이 전혀 다른 존재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마법 같은 순간으로 화한다.

블록버스터 감성 vs B급 감성

재미있는 일이다. 피터 잭슨은 여전히 피터 잭슨이다. 2억달러짜리 꿈의 프로젝트를 건설할 자본과 할리우드의 신임을 품에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무인간의 최후> <피블스를 만나요> <데드 얼라이브>의 잭슨은 여전히 <킹콩> 안에 살아 있다. 오랜 팬들이라면 해골섬으로 향하는 벤처호의 선창(船艙) 안에서 <데드 얼라이브>에 등장했던 ‘수마트라 산 쥐원숭이’(Sumartan Rat Monkey)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특히 오리지널에서 삭제된 뒤 완전히 사라져 팬들 사이에서는 도시전설처럼 떠돌던 거미함정(Spider-Pit) 시퀀스의 재현에 이르면, 오래된 저예산 호러감독 피터 잭슨의 자장은 확연하게 도드라진다. 잭슨은 DVD로 재출시된 33년작을 위해 거미함정 장면을 복원시켰고, 새로운 <킹콩>에서는 이 장면을 소름끼치는 규모로 재창조했다. 바퀴벌레, 온갖 촉수를 드리우며 머리를 빨아먹는 촌충들,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거대한 귀뚜라미들, 거미들, 눈 뜨고 쳐다보기도 힘든 절지동물들이 콩의 습격으로 깊은 협곡에 추락한 인물들을 무참하고 신나게 학살한다. 기실 이 시퀀스는 통째로 들어내더라도 영화의 진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B급 영화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육식 절지동물들의 카니발은 지난날의 피터 잭슨을 웃음지으며 회고하게 만든다. 마치 <스파이더 맨2>에서 전기톱을 든 의사와 닥터 옥토퍼스의 결투를 보며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를 발견했을 때의 환희처럼. “나는 언젠가 또 다른 저예산 호러영화를 만들 것이다. 지난 10년간 단 2개의 프로젝트(<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킹콩>)를 만들었다. 이제는 또 다른 저예산 호러영화의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가 되었다.” <반지의 제왕>으로 제왕이 된 지금에도 그는 왕이 아니라 신발없는 원정대에 머무르고자 한다. 과거를 망각하고 스스로 왕좌에 똬리를 튼 할리우드의 값싼 무관들과 탐험가 피터 잭슨 사이에 놓인 협곡은 크고도 깊다.

9살짜리 피터 잭슨의 꿈과 모험, 그리고 쾌락

“나는 이 영화가 구식의 모험담과 미스터리한 현실도피의 영화, <타잔>이나 <잃어버린 세계> 같은 경험이기를 빈다. 내가 지금 늙은 노친네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현대의 판타지와 SF는 모두 컴퓨터로 만들어진 포스트모던과 묵시록적 미래상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원주민과 괴물로 가득한 미지의 섬 속으로 되돌리고 싶다.” 피터 잭슨의 <킹콩>은 오리지널을 제외한다면 필연적으로 <제이슨과 아르고호의 모험> <신밧드의 대모험> <심해에서 온 괴물> 같은 래이 해리하우젠의 영화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여기에는 아홉살짜리 소년이 영화라는 만화경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 버려진 외딴섬의 협곡과 무시무시한 원주민, 거대한 공룡과 곤충들이 있다. 현대 블록버스터가 어느 순간 상실하고 만 순수한 도피주의적 쾌락이야말로 <킹콩>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피터 잭슨의 목적지다. “도피주의적인 쾌락, 모험과 미스터리와 로맨스, 오리지널 <킹콩>은 좋은 도피주의 영화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겠지만, 나에게 <킹콩>은 진실로 위대한 도피의 환상이었다”고 말하는 피터 잭슨에게 <킹콩>이 평생의 숙원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홉살난 소년 잭슨은 <킹콩>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고, 열두살이 되던 해에 점토로 만든 브론토사우루스와 마분지로 만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모델을 두고서 부모의 슈퍼8카메라를 이용해 첫 번째 리메이크를 시도했다. 바야흐로 35년이 지나서야 아홉살짜리 잭슨의 꿈은 경이로운 완성을 본 셈이다.

“가장 진실된 영화 만들기의 형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가장 나쁜 형태의 영화만들기는 대중의 요구와 젊은이들의 트렌드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킹콩>은 그런 것들에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만든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단지 9살짜리 피터 잭슨을 위해 만들었다.” 잭슨은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스필버그처럼 아버지가 되기 위해 마음속의 아이를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고문하며 성장을 재촉하지도 않으며, 스스로를 세상의 왕이라 일컫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로 머무르는 것이 신나 죽겠다는 철없는 어른처럼, 어린 시절의 환상 속으로 멋지게 도피하기 위해 뉴질랜드의 시골에서 각본을 쓰고 미니어처를 만들고 카메라를 든다. “들어봐.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를 만들 거야. 누구도 보거나 듣지 못한 이야기. 내가 돌아오면 너는 완전히 새로운 형용사(광고문구)를 만들어두어야 할 거야.” 허풍과 야망으로 가득한 칼 덴햄의 선언처럼, 피터 잭슨 자신이 스스로에게 헌사하는 <킹콩>이야말로 완벽하게 새로운 형용사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 물론, 새로운 형용사가 발명되지 않은 이상은 구태의연하고 오래된 형용사들을 빌려올 수밖에 없을지니. 거대하고, 빠르고, 무시무시하고, 아름답고, 애절하고, 경이로운 <킹콩>은, 디지털 특수효과와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드물게 성취해낸 순수한 천상의 피조물이다.

천상의 피조물들 - 캐릭터와 배우들

빛나라 캐릭터의 별!

피터 잭슨은 새로운 <킹콩>을 위해 몇몇 오리지널 캐릭터들을 손보았다. 세실 B. 드밀이나 데이비드 셀즈닉의 또 다른 버전이었던 감독 칼 덴험은 야심만만한 젊은 날의 오슨 웰스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로 바뀌었고, 거친 선원이었던 잭 드리스콜은 아서 밀러 타입의 극작가로 변모했다(드리스콜과 대로우는 자연스럽게 아서 밀러와 마릴린 먼로 커플을 연상시킨다). 특히 잭 블랙의 칼 덴험은 피터 잭슨 자신의 어두운 반쪽,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블록버스터 감독을 거울처럼 투영한다. 오리지널에서는 ‘선원들’로 뭉쳐서 소개해도 좋을 만큼 엑스트라에 가까웠던 조연들과 새롭게 첨가된 인물들 역시 저마다의 방점을 영화 속에 찍는다. 특히 칼 덴험과 조수 프레스톤(톰 행크스의 아들인 콜린 행크스), 일종의 유사부자를 형성하는 항해사 헤이스(에반 파케)와 선원 지미(제이미 벨)는 단 한 장면만으로도 캐릭터간의 관계가 읽힐 만큼 튼튼하게 묘사돼 있고, 배우 브루스 박스터(카일 챈들러)와 선장 잉글혼(토머스 크레츠먼)을 위시한 각각의 조연들 역시 스펙터클의 정경에 쉬이 압사하지 않는다.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거치며 거대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물들에게 세심한 캐릭터를 부여하는 능력을 체득한 듯하다. 물론 <킹콩>의 가장 중요한 배우는 콩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와 앤 대로우 역의 나오미 왓츠다. 벌레에게 죽음을 당하는 요리사로도 등장하는 서키스는 “위험하니까 동물원에나 가보라”는 감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의 고릴라 보호구역에서 생활하며 고릴라의 습성을 익혔다. 나오미 왓츠의 말에 따르면 “너무 고릴라 같아서 감정을 이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고. 나오미 왓츠는 “너무도 훌륭한 배우다. 페이 레이처럼 비명을 지르면서도 B급 배우의 캐릭터에 진짜 고결함과 진정성을 담아낸다”는 <할리우드 리포트>의 평처럼, 그린 스크린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 이처럼 <킹콩>은 특수효과와 피터 잭슨의 자장만큼이나 배우와 캐릭터의 힘이 큰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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