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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영화 결산 좌담 [2]

올해 가장 외면받은 감독, 홍상수김기덕

정성일 : 청룡상은 <웰컴 투 동막골>을 많은 부문에 걸쳐 후보로 올렸고, 대한민국 영화상은 <웰컴 투 동막골>에 상을 몰아줬다. 대중이 이 영화를 지지하는 것과 더불어 영화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뭘까. 의아스러웠다.

김소영

김소영 : 큰 의문 중 하나다. <씨네21>이 영화과 학생을 비롯한 젊은 시네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비평적 인지도와 시장에서의 인지도가 꽤 거리가 있었는데 이젠 그것이 사라지는 것 같다.

허문영 : 영화상들이 언제부턴가 공히 대중투표를 선정 단계에 도입하고 있다. 청룡상은 온라인투표와 전문가를 절충해 후보를 선정하고, 대한민국상은 본심 투표자 1천명을 전문가와 관객 500명씩으로 나누고 있다. 놀라운 건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선정하는) 영평상이 후보작 10편을 온라인투표로 뽑았다는 사실이다. 부분적으로는 대종상이 오랫동안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도 작용했겠지만 비평적 권위의 추락,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대한 폄하, 더불어 영화에서 대중성이라는 요소가 평가절상되고 있는 추세가 골고루 반영된 게 아닐까. 홍상수와 김기덕의 영화가 세 영화상의 어떤 후보작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굉장히 놀랍다. <극장전>에 대해서는 정 선배와 함께 긴 평을 썼고 여러 매체에서 한 작품의 몫으로는 충분한 양의 평이 제출됐으니 외면당했다고 보긴 힘들다. 문제는 영화상들이 외면했다는 점인데,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얼마 전 <씨네21>이 진행한 젊은 시네필의 설문 결과 영화아카데미를 제외하고는 홍상수와 김기덕의 이름이 기대보다 저평가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생각에는 영화형식에 관한 관심의 문제 같다. 예컨대 분단을 비롯해 시대를 끌어안거나 전통적 휴머니즘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영화형식 자체에 대한 미학적 탐구를 보여주는 영화와 감독들을 향한 관심이 옅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김소영 : 영화과 학생들은 영화만들기를 직업으로 생각한다. 시장에서도 성공하고 인지도도 얻는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그것이 기준이 됐다. 확대해서 보면 대중 역시 금융자본의 엄청난 투기성 속에서 살고 있고 뻥튀기가 되지 않는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먹고살 뿐 아니라 웰빙을 할 수 있는 감독과 작품을 지향한다. 직업으로서의 영화감독, 이것이 시대적 코드인 상황에서 이를테면 김기덕식의 사투와 생활은 예술가로서 존경스러울지언정 라이프 스타일로는 끌리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보스로서의 영화감독’ 같은 코드가 강하다. 작품의 형식, 역사인식, 작가적 태도, 궁핍한 재료를 갖고 풍요한 것을 만드는 능력은 차치하고,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영화감독이 중요한 것 같다. 조금 비약하자면 루카스나 스필버그는 보보스의 대표격이다. 대자본을 동원하고 그것을 증식시킬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보유하면서 삶은 히피 스타일로 사는 것, 이것이 뉴 할리우드를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예컨대 김지운이나 박찬욱 감독이 자기식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갈 수 있는 인물로 조명된다.

정성일 : 독자들을 대신해 질문하자면 허문영씨는 <극장전>이 홍상수의 과거 5편 영화에서 무엇이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나.

허문영 : 시간이 갈수록 <극장전>의 성취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게 느껴진다. 하나는 줌인과 줌아웃의 카메라 기법을 통해 개별 프레임의 안정성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전>은 고의적으로 미장센의 안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이는 중요한 변화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이 지녔던 고도의 자기 부정성과 연관지어 생각되기도 한다. 둘째로 <극장전> 이전의 영화가 홍상수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면 <극장전>은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인가, 망상인가, 실재인가, 소망인가?”라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극장전>

<활>

정성일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는 영화마다 반드시 아름다운 숏이 있었다. <극장전>이 명백한 성숙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름다운 신은 있으나 아름다운 숏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제 영화가 보여지는 방식이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는 홍상수가 새로운 수준으로 도약했다는 인상이 있었다. 한편 우려도 있다. <극장전>은 이를테면 두번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영화라고 느꼈다. 이제까지의 영화는 신이 붙어 있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해석을 불러일으켰다면 <극장전>은 보는 사람이 구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조가 이뤄내는 협주를 볼 방법이 없는 영화다. 수많은 몽타주가 아니라 구조가 아름다움을 빚어냄으로써, 아리아가 들리지 않는 영화다. 그래서 허문영씨의 ‘합주’라는 표현이 굉장히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홍 감독은 우리가 들어가기 힘든 영화를 만들어 스스로 고립되는 느낌이다. 김소영씨가 그것을 “점점 똬리를 튼다”고 표현했지만 이젠 <생활의 발견>에서 틀었던 똬리가 이젠 똬리를 넘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모양이 됐다. 실재와 영화를 연이어 붙여놓고 어느 쪽을 볼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만든 배열(constellation)을 보지 못하는 관객은 흩어져 있는 조각만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기덕의 <>에서도 자초한 고립이 느껴졌다. <빈 집>의 침묵은 이제 할아버지와 소녀의 귓속말로만 전해지고 우리에겐 들릴 생각이 없다. 바다에서 한번도 뭍으로 가지 않고 동서남북을 알 수 없게 표류하는 배 위에서만 이야기를 진행함으로써 이제 “내 배에 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물어보는 듯하다.

김소영 : 허문영씨가 말한 프레임의 불안정성은 <극장전>을 풍요롭게 다시 보도록 하는 힌트 같다. 정성일씨의 말대로 <극장전>이 초대받은 사람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진 건 확실하다. 어찌 보면 지금의 영화시장, 영화문화 안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더 걱정스러운 건 <생활의 발견>에서는 ‘똬리’가 욕망을 향해 가고 있었다면 <극장전>에는 전작에 강하게 드러났던 실패하고야 말 성적 관계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고 매우 희화화돼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강원도의 힘>에서는 무력한 남자와 히스테리컬한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있었는데, <극장전>에서는 히스테리컬한 여자가 전작들 속 남자의 대사를 다 하고 떠나버린다. (웃음) 사실 남자는 별 욕망도 없이 좌절도 없이, 자기 희화화로 간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그러나 허문영씨가 언급한 형식적 불안정성은 그것을 상쇄할 것 같다. 불안정한 에너지는 곧 똬리 속에 남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낳기 때문이다. <>은 <빈 집>에서는 더 나아가진 않은 듯하지만, <빈 집> 같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냐는 주변의 의견도 있더라. (웃음) 압박을 견디며 감독들이 자기 세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평론과 전문저널이 필요하다. 홍상수나 김기덕 같은 감독들이 희귀종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 벤처 캐피털이 쏟아져 들어오고 증자하고 상장하는 문화 속에서 그런 쪽으로 예술적 재능을 소모하지 않는 감독에 대한 독려가 필요할 것 같다.

정성일 : 가장 슬픈 얘기는 부산에서 만난 김기덕 감독이 앞으로 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는다, 내 영화 보고 싶으면 외국에서 출시된 비디오를 사서 봐야 할 거다, 아니면 누군가 내 영화를 수입해야만 볼 수 있을 거라고, 국내 개봉 자체를 포기한 마음을 들려줬을 때였다.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실상 한국영화 속에서 유령이 돼버린 느낌을 받아 무척 슬펐다.

김소영 : 아모스 기타이 감독도 이스라엘에서 정치적 이유에서 쫓겨나 프랑스에서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감독이 됐지 않나. 물론 그래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감독에게 유랑, 유폐, 추방의 경험은 굉장히 좋은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올해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 한 감독,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

<친절한 금자씨>

정성일 : <친절한 금자씨>도 올해의 화두라면 화두다. 놀라운 건 375만명이 봤다는 사실이다. 이영애의 변신, 최민식의 악역, 이야기가 재밌다는 입소문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박찬욱의 생각이 궁금해서 온 이 숫자를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대중이 감독의 생각을 궁금히 여기는 유일한 감독이다. 나는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 3부작이라는 카테고리 속의 앞선 두편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고 본다. 불편하긴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는 하나의 성숙의 징표로 보였다. 박찬욱이 처음으로 자기 영화 안에서 포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진행되다가 영화를 중단해놓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포기를 선택한 건데, 박찬욱은 여기서 더 밀고 나가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훨씬 대중적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포기를 선택한 것이 성숙의 징표처럼 보인다. <올드보이>가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친절한 금자씨>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동시대 영화들이 고아 같은 느낌을 주는, 혹은 아들, 딸 되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박찬욱만이 부모의 자리를 다룬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의 아버지는 부서질 때까지 (복수를) 실현하지만 금자씨는 (복수를) 포기한다. 박찬욱식으로 표현하면, 아버지들은 하는 게 즐거운데 어머니는 보는 게 즐겁다. 하는 것보다 보는 게 즐거운 영화로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 있다. <올드보이> 이후 북미 지역의 영화지들이 왕가위보다 더 중요하게 박찬욱을 다루는 건 어떤 사회도 금지하는 근친상간을 건드리고 파헤쳐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올드보이>가 음란한 자리에 관객을 밀어넣고 즐겁게 했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음란성의 방점을 바꾼 게 아닌가 싶다. 그 음란성을 방어하는 환상을 기술하는 게 박찬욱 영화의 스타일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해야 할 일은 방어에서 환상을 제거해 마주보게 해주는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언뜻 도덕적 질문을 하는 듯하면서 우리에게 윤리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를 작동시킨다.

김소영 : 끝까지 가서 망가지는 대신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는 건 미국식 멜로드라마의 근간을 떠올리게 한다. 린다 윌리엄스가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멜로드라마에 대해 기술했는데, 미국은 배심원 제도를 만들어내고 이와 유사한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 마치 O. J. 심슨 같은 사건의 과정을 보게 하는. <친절한 금자씨>는 굉장히 형식주의적이다. 이전 복수극과 달리 개인적 영웅이 아닌 배심원 제도로 서사를 치환하면서 세계시장 속으로 들어간다. 여성의 복수극은 타란티노의 포뮬라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인데 <친절한 금자씨>는 윤리적 고뇌보다는 내러티브를 유니버설하게 바꿨다는 점에서 형식적이다. 그 전에는 오이티푸스라는 심리적 서사였다면.

허문영 : 동시대 아시아 감독 중에서 미주와 유럽에서 동시에 지지자를 거느린 감독은 그가 첫 번째가 아닌가 싶다. 언젠가 글로 썼지만, 박찬욱의 매혹은 장르영화를 만들면서 리얼리즘의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서술하면서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올드보이>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에서 출발하고 <친절한 금자씨>는 유괴범이 옥중에 들어가서 생활하고 나오면서 시작한다. 장르 영화적 관습 아래서 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해 장르적 쾌감을 경유하는 게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이런 이야기 전개방식은 동시대에는 별로 없다. 장르영화에 능한 미국에서도. 박찬욱의 이런 방식은 장르영화가 가진 페티시즘 혹은 손상된 육체의 매혹, 윤리적 금기 위반 등의 요소가 지닌 자극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할리우드 리포트> 발행인이 올해 5월 방한해 <올드보이>가 한국만의 고유한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타란티노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봤음에도 그가 한국적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이런 점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박찬욱의 이런 서사 방식이 대중영화의 층위에서 새로움을 말할 수는 있으나 영화의 새로운 서사인가에는 의문이라는 거다.

정성일 : 허문영씨는 박찬욱 영화의 서사가 불편하다고 여러 번 말해왔는데 어떤 점이 그랬나.

허문영 : 난 타란티노의 스타일, 속도감,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좋아하는데 박찬욱이 불편한 건 근본적으로 윤리적 태도를 끊임없이 주문처럼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선 무정부주의적 휴머니즘, <올드보이>에선 가족주의, <친절한 금자씨>에선 모성이라는, 역시 가족주의를 말한다. 이런 윤리적 기호들, 장치들이 고도의 윤리적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오는 음란성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데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현실적 요소를 끌어들여 장르적 음란성, 페티시즘을 좀더 자극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정성일 : 오히려 문제는 윤리적 주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념적 주체들만 존재해서 이들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징적 법에 기대어 문제를 처리하면서 마치 그게 윤리인 양 위장하니까 불편한 게 아닐까.

허문영 : 나도 그것을 위장이라고 본다. 윤리적 강박증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핑계라는 점에서.

김소영 : 타란티노는 도착적 자극을 다루지만 윤리를 다루지는 않는다. 브루노 뒤몽은 관객에게 사회적 쾌락을 주지만 극도의 성찰력, 비판력을 안기는 영화적 시각을 견디게 한다. 관객에게 극도로 많은 걸 요구하는 거다. 타란티노는 금기와 쾌락의 동시적 생산과 발생이라는 기제를 잘 알고 있고 그 안에서 흥분을 일어나게 만드는데 관객에게 요구하는 게 많지는 않다. 박찬욱은 그 중도의 노선이다. 그래서 대중 친화적이고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일으킨다. 타란티노 영화에서는 배심원 제도로 가기를 기대하기 힘들고 브루노 뒤몽에게선 배심원을 배제하기 힘든데 <친절한 금자씨>에서 배심원을 가져온 건 말하자면 미국식 대중민주주의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형식으로 보면 성숙이라기보다 협상인 것 같다.

허문영 : 개인적 집행이 일종의 배심원적 집행으로 바뀐 것을 진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친절한 금자씨>의 배심원들은 피해자들인데 이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나약함 혹은 비겁함 혹은 잔인함들을 보여줌으로써 집행과정이 두 전작에 비해 훨씬 냉혹하고 냉소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전작들의 집행은 폭발적인 감정의 행위로 이뤄진 반면 여기선 카메라가 냉소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영화세계가 좀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나 전략의 수정으로 볼 수 있는 진전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정성일 : 테마의 문제를 제외해놓고 보면, 박찬욱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감독들이 다룰 수 있는 영화적 표현영역이 좁아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를 박찬욱이 잘 사용하면서 이제 한국영화에서 시네마스코프는 박찬욱 사이즈처럼 돼버렸다. 또 장도리신에 이어 골목신의 수평 트랙킹신은, 왕가위의 스텝 프린팅처럼, 수평 트랙킹을 자기 언어화했다. 또 사람을 정면으로 앉혀놓고 그 뒤에 배경을 배치하는 머그 숏은 김기덕과 더불어 박찬욱이 가장 잘 쓰고 있다. 특정 프레임, 숏, 스타일을 그는 아주 빠르게 자기 브랜드화하고 있고,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임에 틀림없다.

허문영 : 박찬욱이 굉장히 뛰어난 점은 캐릭터 묘사에 있지 않나 싶다. 최근 많은 대중영화들이 그렇게 부조리한 캐릭터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경우가 없다. 지금의 많은 대중영화는 60년대의 뛰어난 영화보다 더 평면적인 인간에 의존한다. 반면 박찬욱은 어떤 윤리적 정체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부조리극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것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스타일이나 사운드에서 박찬욱을 충실히 흉내내더라도 인물을 비슷한 수준으로 그려내기는 힘들 듯싶다.

정성일 : 첨언하자면, 시네마스코프를 쓰면서 그만큼 캐릭터와 카메라의 초점거리를 짧게 선정한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캐릭터와의 거리를 짧게 다가가서 만드는 게 캐릭터를 뒤틀고 기형적으로 만들고 관객과 가깝게 붙어서 말하는 방식이 아닌가.

허문영 : 일본영화에서 정면 응시 숏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게 오즈 야스지로부터 기타노 다케시까지 다양한데 시네마스코프에서 그렇게 짧은 거리로 잡는 건 확실히 독특하다.

올해 가장 불우한 운명을 겪은 영화,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

정성일

정성일 : 올해 불우한 운명(오프닝 삭제 사태, 씨네21 515호 기획 ‘타이틀 시퀀스 베스트 10’ 참조)을 겪은 <그때 그 사람들>을 이야기해보자. 영화만 놓고 보면 박정희가 총을 맞는 절반까지만 재밌었다. 사실상 이 영화의 질문은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여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그 지점에서 끝나버리고 남은 자들이 맞이한 실체는 <한겨레> 임범 문화부장이다. (폭소) (*<한겨레> 임범 기자가 전두환 역으로 잠깐 출연했다.) 이 질문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영화가 풍속화- 허문영씨는 평에서 긍정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로 끝난 것 같다. 나는 <그때 그 사람들>이 정치영화라기보다 웰메이드 액션영화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3년 전에 이회창이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면 몰라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지금의 현실에서는 액션영화의 맥락에 놓인 것 같다. 또, 영화 속 박정희는 무섭고 끔찍하고 냉혹한 아이콘 독재자가 아니라 늙고 추레하고 거의 모든 힘이 빠져버린 듯한 영감님으로 나옴으로써 ‘괴물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박근혜가 다시 돌아오는 지금,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바람난 가족>의 불어제목이 <한국 여자>였다. 그래서 나는 <바람난 가족>은 한국에서나 문제가 되는 얘기였지, 여성 문제에 대한 전면적 질문이라기보다 한국 여자 아줌마의 풍속화라는 느낌을 받게 됐다. 허문영씨가 말한 ‘풍속화’에서 가져온 개념인데, 임상수는 <바람난 가족>부터 실상 점점 더 한국감독이 되어가고 있다. <그때 그 사람들>, 1980년대 쫓기는 운동권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다음 영화 <오래된 정원>까지 점점 더 한국적 소재와 주제에 이끌리고 있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임상수는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동세대 감독 속에서 임권택의 적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바람난 가족>부터 세 작품의 면면을 보며 사실 임상수의 관심은 가족 문제이고, 가족 문제를 다룰 때 핵심은 아버지이며, 이 아버지는 나약한 아버지이며 근대의 아버지들은 왜 자기 역할을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점에서 남성성의 재구성을 요구하는 영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므로 <바람난 가족>의 이야기를 나는 호정이 아닌 영작에 방점을 두고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정성일 : <그때 그 사람들> 당시, 그러니까 <PD수첩>과 황우석 논란 이전에 한국사회에서 말하지 못하는 주제는 없어진 듯했다. 문제는 금지됐던 걸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었고 소재보다 시선, 시각의 영역을 재구성해서 역사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보지 못했던 것, 청와대나 계엄령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자정 이후의 서울거리 등을 재구성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보면, 정치적 역사적 정보가 이미 있고 박근혜가 부활하는 걸 보는 마당에, 박정희를 그리는 건 비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 말해지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사료를 통해 그려낸 것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게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그때 그사람들>은 충분히 세지 않았다.

<그때 그 사람들>

허문영 : 풍속화라는 건 성화와 대비해서 한 말이다. 한국영화에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소재를 다루는 보편적 방식은 역사적 시간을 악몽으로 기록하는 거다.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교정 안 되는 거대한 신의 영역이 된다.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에서 역사적 사건의 실체, 주도자들이 신의 영역에 있었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성화에서 뛰어놀던 인간과 사건들을 인간의 땅 위에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광화문 거리로 끌어와서 아주 비루한 풍속화로 그려냈다. 이건 중대한 성취다. 소설이건 드라마건 영화건 권력자들의 파워게임을 다루면서 이만큼 냉정한 시선의 풍속화로 그려낸 건 드문 일이다. 이 영화가 공격하는 대상은 당대의 권력자가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기억 혹은 강박증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선 굉장히 계몽적 영화라는 생각도 한다. <효자동 이발사>처럼 피해자의 위치에서 자기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건 작가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실은 신들이 아니라 비루한 인간이라고 하는 폭로 자체만으로도, 한국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서사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다. 역사가 한편으로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한편으로는 헤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기억되는 작금의 갖가지 난무하는 서사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이 영화의 사명은 거기서 끝나면 되는 게 아닐까. 아버지를 죽이고 난 이후의 오이디푸스의 궤적은 이 영화의 관심사 밖인 것 같다.

정성일의 2005 베스트 10

<휴일>, <스파이더>, <과거가 없는 남자>, <극장전>, <카페 뤼미에르>, <밀리언달러 베이비>, <>, <에로스>의 에피소드 중 왕가위의 ‘그녀의 손길’, <브로큰 플라워>, 전주영화제 2005 디지털 삼인삼색 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세속적 욕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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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명헌·장소협찬 삼청동 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