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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판타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오정연 2005-12-27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갈수록 그 세계는 멀어지고, 실제적인 감각의 힘을 빌리지 않은 상상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간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네 남매가 숨바꼭질 와중에 옷장 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세상 속 모험은, 그러므로 동심을 잊지 않은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테마다. 이것을 즐기는 것 역시 진짜 아이이거나, 기꺼이 아이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더 케인즈), 루시(조지 헨리). 런던에 거주하던 네 남매는 2차대전의 포화를 피해 디고리 교수(짐 브로드벤트)의 시골별장으로 향한다. 거대한 성을 방불케 하는 디고리 교수의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루시는 옷장 속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루시는 하얀 마녀(틸다 스윈튼)의 저주로 겨울만 계속되는 나니아를 발견하고,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염소인 파우누스족, 톰누스(제임스 매커보이)를 만나 친구가 된다. 현실이 못마땅한 장난꾸러기 에드먼드 역시 루시를 따라 나니아에 발을 들여놓치만, 그곳에서 그가 처음 만난 존재는 하얀 마녀. 아담의 두 아들과 이브의 두딸이 하얀 마녀의 통치를 끝낼 것이라는 예언을 두렵게 여긴 하얀 마녀는 에드먼드에게, 나머지 형제를 데려오면 나니아의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유혹한다. 이제 평범한 네 남매는 마녀의 저주를 깰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사자 아슬란(목소리 출연 리암 니슨)을 도와 나니아의 봄을 부르는 싸움을 통해 영웅으로 성장한다.

1950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전세계에서 1억부 이상 팔린 7권의 <나니아 연대기> 중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은 가장 먼저 쓰여졌고,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반지의 제왕>보다 낮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고, <해리 포터>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통을 자랑하지만 영화로 옮겨진 이상 선발주자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J. R. R. 톨킨과 C. S. 루이스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공유한 친구 사이로 흥미로운 비교대상. 로저 에버트는 <나니아 연대기: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의 프리뷰에서 “톨킨의 우주는 가상의 중간계이지만, 루이스의 우주는 바로 옆문에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세계를 창조한 방식 또한 다르다. 호빗처럼 전혀 새로운 종족을 창조했던 톨킨과 달리 루이스는 익숙한 신화적 존재(파우누스, 켄타우로스)를 끌어들였다.

요컨대 <나니아…>는 <반지의 제왕>과는 비할 수 없는 ‘소박한’ 판타지다. 앤드루 애덤슨 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제작진들은 영화로 옮겨야 할 소설책이 어릴 적 기억만큼 두껍지 않고, 이야기 구조며 클라이맥스의 전투신 역시 생각만큼 복잡하거나 스릴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는 어릴 적 손에 땀을 쥐며 읽었던 원작을 기억하는 어른 관객 역시 다르지 않다. 10살 남짓한 아이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전투에 목숨을 건다는 것도, 그들이 왕국을 지배하는 왕과 여왕이 되는 결말도 어른이 된 우리에겐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여타의 대작 판타지물과 달리 <나니아…>는 원작에 충실하고 싶다면 철저히 어린이 관객을 타깃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 결과 네 남매의 모험담이었던 소설은, 전형적인 성장담을 담은 가족영화로 변형된다.

<슈렉>을 통해 동화와 휴머니즘, 시각효과를 적절히 사용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앤드루 애덤슨 감독은 원작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 안에서 오늘날 어린 관객의 눈높이를 맞춘다. 형제의 서열에 따른 네 아이의 구체적인 캐릭터, 2차대전 상황의 런던에서 벌어지는 어머니와 아이들의 이별,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 “전쟁은 추악한 것”이라는 아슬란의 대사 등 추가된 부분은 할리우드영화 속 익숙한 설정이다. 에드먼드가 마녀의 꾐에 넘어가게 된 계기도, 마녀가 준 터키 젤리를 주된 이유로 설명하는 원작과 달리 언제나 간섭하는 형을 하인으로 부리고 싶은 에드먼드의 아이다운 욕망을 내세운다. 원작의 장점을 영화화한 사랑스러운 부분도 눈에 띈다. 옷장 속에서 한발씩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세계와 가까워지는 설렘, 생전처음 낯선 존재를 만나 두렵지만 금세 마음을 여는 아이들의 천진함은 어른 관객의 잊혀진 동심까지 되살린다.

언제부턴가 판타지영화와 놀랄 만한 스펙터클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소박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나니아…>의 친근한 비주얼은 다소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 이미 우리는 헬름 협곡과 펠레노르 평원 전투를 경험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아슬란과 하얀 마녀의 싸움 장면. 2만개가 넘는 캐릭터와 실감나는 무기를 공들여 제작할 수는 있지만, 그 캐릭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영웅이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원작 자체는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화를 대신하려 했던 <반지의 제왕>과 달리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 가깝다. 아이의 충만한 상상력으로 빈구석을 메우며 숨가쁘게 책장을 넘길 때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텍스트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이들이 열광할 만한 황금의 프로젝트로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제작사 월든 미디어는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 이후 <캐스피언 왕자> 역시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애초 흥행 결과에 따라 이후 시리즈의 제작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제작사의 선언에 비추어 이 시리즈가 끝까지 영화화될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물론 영화 <나니아…>는, 책장을 덮고 옷장 뒤편을 더듬거릴 수 있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더없는 꿈이고 최고의 모험이 되어줄 만하다. 그러나 나니아로 향하는 통로는 언제나 옷장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언제 다시 맞닥뜨릴지 몰라 아련한 꿈, 혼자서 간직하기에 더욱 소중했던 꿈을 기억하는 어른들 역시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성장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유쾌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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