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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양심적 병역 기피’를 옹호함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정희진(대학 강사) 2005-12-30

며칠 전 내 또래 남성이, 나로서는 재밌고 바람직했지만 그로서는 비참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 그는 생계와 사회활동을 이유로 외박을 일삼으며 살았다. 항의하는 아내에게는 “나 간섭 말고, 당신도 그렇게 살면 되잖아”라고 받아쳤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 비까지 내리는데, 아내가 귀가하지 않아 걱정이 된 그는 우산을 들고 마중 나갔다. 만취한 아내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뒤따라 어떤 남자가 아내를 부축하며 같이 내리는 것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은, ‘신사답게’ 그와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데려올 것인가, 아니면 ‘박력있게’ 상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당신 뭐야!”를 따질까… 갈등으로 뒤죽박죽이었다.

결과는? 머리보다 발이 빨랐다(몸에서 뇌가 가장 반응이 느린 부위다). 그는 “무서워서” 혼자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사실, 박력있는 남자와 신사는 같은 의미(남성다움)다.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사회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라’고 남성에게 가르치는 문화적 각본이다. 그는 지침을 위반하고, 자기 몸의 반응에 충실하게 ‘비겁한’ 남자가 되어 ‘도망’쳤다. 나약해짐으로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하나인 남성성에 저항한 것이다. 니어링 부부의 말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지 말고 사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매년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이유로 600여명의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어 스스로 감옥행을 택한다. 병역 거부 양심수는 2005년 9월15일 현재, 1186명. 단일 사안으로는 최대 수감 인원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는 일제시대 신사 참배와 징병 거부에서 시작되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징병제도가 정착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군 입대 이후 집총을 거부하면 ‘항명죄’로 군형법 44조에 의해 처벌받으며, 입대 자체를 거부하면 ‘병역 기피죄’가 적용되어 병역법 87, 88조에 따라 처벌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항명죄 혹은 병역법 위반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무려 1만여명.

물론,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병역 비리, 병역 기피와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평화주의적인 개인의 양심에 따라 사격이나 총검술, 전쟁과 살인을 정당화하는 군대의 목적에 반대한다. ‘생명을 해치지 않을 권리로서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폭력을 자원으로 삼고 나약함을 여성성과 등치시켜 비하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문제는 군사주의가 일상에 뿌리깊은 한국사회에서, 병역 거부는 사회 전체의 군사주의 시스템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거부자 개인의 엄청난 용기와 결단(강함)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병역 거부 운동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강한 남성성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보다 더 강해야 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징집영장을 불태우거나 전쟁터에서 “살아 있는 인간을 해부하라”는 식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훌륭한 남성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도, 잔인한 명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남자다운’ 사람이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두렵고 손이 떨려서 할 수 없는 나약함’을 옹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군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 더 강한 남성다움을 요구하는 ‘거부’보다는, 나약함과 폭력 ‘기피’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인식의 전환이, 좀더 근본적인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군대를 통해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한 <용서받지 못한 자>는 걸작임에 분명하다(나는 이 영화를 보고 푸코와 소설가 정찬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이, 부적응자 지훈과 내내 갈등하는 나약한 승영의 자살을 두고 “어설프게 개기는 게 제일 위험하다, 승영처럼 살지 말자”고 말하는 걸 보고 심란해졌다. 군대 문화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나약함의 패배’로 결론나다니….

며칠 전 모 방송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여자들 때문에 요즘 남자들 기가 많이 죽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어떻게 책임질 건가)”라는 지겨운 질문을 받았다. 나는 “기 살려서 어디에 쓰실 건가요?”, “기 살리기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기를 좀 나누면 안 될까요?”라고 되물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 내용과 윤리를 둘러싼 논란, 삼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빠지지 않는 논리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 잘되는 꼴을 못 본다”, “밖(국제무대)에 나가서 일할 사람 기를 죽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응원과 흠모, 동일시가 두렵다.

* 이 글 중 일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www.corights.net의 최정민 공동집행위원장에게서 도움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