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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꿈꾼 여인의 초상, <청연> [2]
이성욱(<팝툰> 편집장) 사진 오계옥 정리 이다혜 2006-01-03

<청연> 기자시사 뒤 만난 윤종찬 감독 인터뷰

“시대의 비극을 다른 형태로 다뤄보고 싶었다”

<청연> 기자시사를 마친 뒤 간담회에서 윤종찬 감독이 받은 첫 질문은,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박경원의 친일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윤종찬 감독은 담담했다. 일본에 가서 직접 취재한 박경원에 대한 사료로 얻은 사실 설명으로, 무엇보다 영화 <청연>으로 그는 애국자의 영웅담을 그리려고 했던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앉은 자리에서 윤종찬 감독은 제작비 초과와 무한정 길어질 것 같았던 제작기간 때문에 괴로웠던 심경을 “백척간두”에 선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감독의 사상검증이 필요한 소재를 다룬다는 사실은 괴로움을 덜해주지는 않았지만, 또한 감독으로서 의미있는 모험이었다고도.

-<청연>을 통해 ‘꿈을 좇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경원은 역사적 인물이고 이미 그녀의 죽음도 알려져 있다. 비극적 결말을 맞은 인물을 그리면서 그리고자 했던 꿈은 어떤 것이었나. =<청연>의 배경은 일제시대이기 때문에 박경원의 꿈이라는 데는 양면성이 있다. 조선에는 비행사가 하나도 없으니 일본에 가야만 비행술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반적으로 비행사 자격증만 따고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박경원은 한발 더 나아가 비행대회에 나갔고 장거리 비행을 필생의 꿈으로 삼았다. 장거리 비행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자신의 비행기가 필요했고, 무엇보다 일본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박경원의 꿈은 시작할 때부터 비극성을 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박경원은 지명도를 얻어갈수록 조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꿈을 이룰수록 동포로부터 멀어지는 행위가 되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간 인물이다.

-<소름>은 자기를 옭매고 있는 비극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청연>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다. =<청연>의 경우, 내가 설정한 결말이 아니었다는 차이가 있다. 역사적 사실이니까. 일장기를 들었다든가, 일만친선비행에 나섰다든가 하는 것은 박경원에 관한 가장 명확한 사실이다. 그녀를 오늘에 되살려 본받자는 의도는 아니다. 박경원은 조선이고 일본이고 생각하지 않고 비행만 생각한 여자지만 결국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꿈을 포기하든가, 끝까지 쫓든가의 선택뿐이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박경원은 매국노라고 지탄받고도 끝까지 꿈을 좇았다.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녀에게는 역사적 면죄부가 쥐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잉태된 비극성이라는 게 감독으로서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우리가 일제 치하의 비극을 다룰 때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인물이나, 모든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로 보내는 지식인상을 그리는 게 다였다. 그런 영화는 많이 찍어왔잖나. 감독으로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시대의 비극을 다른 형태로 다루고 싶다는.

-첫 장면이 보기에 따라 도발적으로 느껴질 여지가 다분하다. 일본군을 보는 조선인들이 다 울고 있는데 어린 경원만 너무 해맑게 웃고 있다. =그 시대의 아이들 모두가 식민지라는 문제의식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민지 치하 십대라고 해도 아이들은 아이들다운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쌀을 빼앗겼다면 이해하겠지만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을 열살도 안 된 아이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첫 장면은 ‘한번 타본 비행기가 참 좋다, 나도 몰아보고 싶다’는 경원의 마음으로 찍은 장면이다. 박경원이 비행사를 꿈꾸는 이유는 그때 들판에서 본 비행기 때문일 것이다.

-박경원의 소망은 양날의 칼이다. 꿈을 버리거나,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으면서 꿈을 향해 가든가.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도 파국은 예정되어 있다. =일제시대를 다룬 영화에서 가장 흔한 드라마는 극중 김상수와 같은 인물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을 암살하고 장렬히 자결하는 지혁의 친구 김상수는 분명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박경원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감독으로서 모험이었다. 늘 조심스러웠다. 1년 넘게 시나리오를 쓰면서 고민이 많았다. 남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어가는 마당에 박경원은 꿈이라는 명목 아래 너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든 생각은, 당시 조선인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라는 거다. 나라를 빼앗겼어도 가족을 먹어살려야 하고, 일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본인 아래서 일을 해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민중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비행 장면 연출의 주안점은. =비행 장면은 일단 규모면에서 블록버스터다운 위용을 보여준다. 연출면에서 욕심을 부렸던 것은 비행 장면을 통해 드라마를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전 일본 비행선수권대회 신에는 전쟁 전 일본의 집단적인 광기가 녹아 있다. 박경원이 비행을 배운 다치가와는 도쿄를 지키는 하늘의 요새라고 불렸던 곳이다. 여의도 광장의 20배 정도 되는 엄청난 규모의 비행장이었다. 유사시에는 다치가와의 공장에서 비행기를 직접 만들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박경원은 우승을 했지만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는데 왜 이러지’ 하는 그 느낌은 박경원의 운명이 지닌 비극성에서 온다. 우승했으면 장거리 비행을 가야 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조국에서는 매국노라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인화 작가가 공동 각색으로 참여한 점이 의아스럽다. =내가 <청연>에 참여했을 때 이인화 작가가 이미 시나리오 작업을 상당 부분 마친 상태였다. 다만 영화에 접근하는 시각이 확연히 달라 결과적으로 그가 쓴 원고와 영화화된 원고는 많은 부분 달라졌다.

-<소름>에서도 <청연>에서도 비극은 상당 부분 아버지에서 연유한다. 박경원도, 한지혁도. =자료조사를 하면서의 에피소드 하나는, 박경원의 아버지에 관한 대목이었다. 박경원의 아버지는 대단히 완고한, 아들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딸만 줄줄이 낳으니까 넷째 딸 이름은 섭섭이라고 짓고 다섯째인 경원의 이름은 원통이라고 지었다. 그래서 박경원의 본명이 박원통이다. 그러니 박경원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영화에서처럼 산에 나무하러 보내고 하는 식으로 키웠다. 박경원은 스스로 공부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름을 경원으로 바꾸었고, 일본에 가서도 학비를 벌며 공부했다. 당시 조종면허를 따려면 자동차 정비를 배우고, 자동차 면허증을 딴 뒤 이론을 마스터해야 조종기술을 배울 수 있었는데 박경원은 조종과 들어가는 데만 5년 넘게 걸렸다. 돈이 있는 학생들은 몇 개월 만에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지만 박경원은 자기가 벌어서 학교를 다니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역도산>에서 보면 역도산이 구조적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게 보이는데, 박경원은 고생하는 모습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완성본에 생략된 장면이 있다. 중국에서 찍은 장면 중 박경원이 돈을 벌기 위해 방직공장에서 착취당하며 일하다가 소요사태에 휘말리는 대목이 있다. 문제는 중국에서 아무리 공장을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아주 작은 공장밖에 없어서 그곳에서 찍었는데, 박경원의 처절함은 드러나지만 공간 자체가 너무 작아 쓸 수가 없었다. 그 장면을 다시 찍기에는 출혈이 너무 컸다. 그 장면을 제대로 못 찍어 넣은 게 가장 안타깝다.

-한국에서 100억원 정도 예산의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 체감한 한계는. =한국에는 큰 작품을 효율적으로 이끌 만한 PD 라인이 정말 미약하다. 큰 작품을 해본 PD들이 없다. 한 작품 해서 잘되면 영화사를 차려버리니까. 시나리오 작가도 한편 잘되면 감독으로 데뷔하고. 그러니 인프라가 없다. 영화 규모가 클수록 정확한 데이터에 의해 PD가 움직여야 한다. 예산의 A안, B안, C안, 백업플랜까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매사가 주먹구구식이다. 사실 <청연>이 100억원 가까이 썼다지만 시행착오로 누수되는 비용이 많아서 스탭이 느끼는 체감 예산은 70억, 80억원밖에 안된다. 게다가 <청연> 같은 경우는 감독의 사상 검증이 한번은 되어야 하는 작품이잖나. 영화 개봉 뒤 마녀사냥이 시작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온라인에서 한번 마녀사냥을 시작하면 어떤 변명도 안 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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