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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스펙터클은 여배우에게 무엇일까?

로마 제국 탄생이라는 거대한 서사시의 스펙터클한 드라마 <ROME>. 2천년 전의 로마를 재현하기 위해 천억 원이라는 가늠하기 힘든 제작비가 들어갔단다. 뭐 내가 직접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세트 규모는 6천 평이 넘고 4천벌이 넘는 의상과 천 켤레가 넘는 신발이 쓰였단다. 천 단위 아니면 상대 안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이니 제작사나 방송사나 난리칠 만하겠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란 건 BBC 와 HBO 두 방송사가 힘을 합쳐 쏟아 부은 그 물량 때문이 아니다. 첫 회부터 현란한 볼거리와 수많은 엑스트라로 떡칠한 것 때문도 아니다. 방영 전부터 틈만 나면 뿌려댔던 OCN 광고가 내 입을 벌어지게 했다.

TV 시리즈, 그것도 초대형 스펙터클 드라마의 광고라면, 가장 화려하면서도 가장 극단적인 장면들이 난무하는 게 당연하다. 폭력과 섹스와 음모와 광기,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면서도 도덕적 판단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은 그것을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거란 말이다. 거기까지도 이해했다. 뜨악해지는 건 <ROME>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인터뷰였다.

인물 1 : 로마 제국의 모든 것이 이 세트장 안에 있다. 제국의 탄생을 이처럼 철저하게 고증한 드라마는 없을 것이다. 인물 2 : 평범한 병사의 눈을 통해 로마 제국에 얽힌 사랑과 배신, 우정과 증오를 느껴보아라.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인물 3 : 너무나 폭력적인 드라마다. 폭력이 리얼해서 눈을 감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인물 4 : 섹스 씬이 이렇게 많을 거라 생각 못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섹스 씬 때문에 촬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인터뷰를 그 즉시 받아 적을 만큼 순발력이 있지는 못해서 백 프로 정확하지는 않겠으나, 시저나 옥타비아누스, 아티아 등 로마를 쥐었다 폈다 했던 배역이라 짐작되는 배우들의 인터뷰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인물 1, 2는 남자배우이고 인물 3, 4는 여자배우다. ‘철저히 고증된’ 로마의 전투복을 입거나 웃옷을 벗어 제낀 땀방울의 근육질 남자배우들은 드라마의 스펙터클을 마음껏 즐기라 말하고,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드레스를 걸치고 음모를 품었음직한 아름다운 얼굴의 여자배우들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촬영을 힘들어하고 있다.

남자배우들의 멘트들은 너무나 공식적이어서 제작사가 뿌린 보도자료를 읽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고, 여자배우들의 멘트는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연기의 몰입도를 의심하게 만들 뻔도 하지만, 아무도 여배우들에게 공식적인 건 기대하지 않을 것이기에 “배우들이 힘들어 할 정도의 폭력과 섹스가 등장한다”는 호기심에 불을 지필 것이다. 배역의 성별성, 혹은 스토리텔링의 성별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같은 차이가, 편집의 ‘묘미’로부터 비롯된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스펙터클 대서사시에서 여자배우들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공화정의 몰락과 제국의 탄생, 이를 둘러싼 사랑, 증오, 배반 등 보편적인 감정을 전달한다”는 <ROME>에서, 여자들의 역사 만들기는 도대체 어떠했길래 섹스씬이 힘들다고 토로한단 말인가. 섹스씬이 등장한다면 여자 혼자만 연기하는 것도 아닐 텐데(내용을 보니 남자 둘이 등장할 수도 있을 텐데) 왜 남자들은 섹스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단 말인가?(혹은 말했어도 짤린단 말인가?)

<ROME>의 광고는, 스펙터클 즉 볼거리라는 것이 여자와 남자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의 극대화라고 정확히 말하고 있다. 천억 원이라는 돈이 ‘통상적인’ 볼거리를 위해 쓰였을 뿐, 다른 상상력이나 배역을 창조하는데 쓰이지 않았다는 게 신경질난다. 광고만 그런 것인지 드라마도 그럴 것인지 보고나서 또 리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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