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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혹은 ‘성숙한’ 멜로, <퍼햅스 러브>
박은영 2006-01-03

사랑 이야기만큼 흔한 것이 또 있을까마는, 누가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울림이 다른 것이, 또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가신은 무작정 믿음이 가는 이름이다. 갱영화와 무협영화의 유행에 가려졌던 홍콩영화의 멜로적 감수성을 깨운 이가 바로 진가신이기 때문이다. 해묵은 영화가 된 <첨밀밀>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최고의 멜로’로 꼽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하늘이 정한 운명이었으나, 당시엔 서로 알아보지 못했고, 10년간 스치고 엇갈리기를 반복하다 거짓말처럼 이국 거리에서 다시 만났더라는, 글로 정리하고 보니 참으로 진부한 그 영화의 매력은, 인물의 관계와 감정이 섬세하고 따뜻하게 그려졌다는 것이었다. 그 진가신이 이번엔 뮤지컬을 택했다고 하니, 거대한 화폭에 화려한 화풍으로 그려낼 사랑 이야기는 또 얼마나 특별할지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퍼햅스 러브>. ‘아마도 사랑’이라는 제목은 영화 속 노래 가사처럼 “돌아보면 더 뚜렷해지는” 사랑의 추억을 감싸안는다. 자의로 혹은 타의로 지워진 사랑을 일깨우는 도우미로, 진가신은 천사 몬티(지진희)를 등장시킨다. 저마다 삶의 주인공인 우린 가끔 지나온 시간들을 무리하게 지우곤 하는데, 편집의 희생자는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연인일 수도 있다. 몬티의 일은 그렇듯 누군가의 인생이 잘못 편집됐을 때 잘린 필름을 찾아 배달해주는 것이다. 이번에 그가 찾아간 곳은 상하이의 영화 촬영장. 10년 전에 연인 사이였던 지엔(금성무)과 손나(주신)가 동료 배우로서 재회하지만, 손나는 지엔을 모르는 사람 취급한다. 손나는 지엔의 기억을 편집해버린 대신 자신의 경력에 날개를 달아준 감독 니웨(장학우)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어 있다. 얄궂게도, 니웨가 연출하고 손나와 지엔이 출연하는 신작은 옛사랑의 기억을 잃은 여자와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남자, 여자에게 새 기억을 주고 연인이 된 서커스 단장의 삼각관계를 그린 뮤지컬이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세 남녀는 애증과 질투로 걷잡을 수 없는 심경이 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과연 “추억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과거가 현재를 만들지 못한다”는 가사는 이들의 엇갈린 사랑을 관통하는 진리일까.

<퍼햅스 러브>는 ‘정통’이나 ‘본격’이라는 수식이 어울리지 않는 뮤지컬로, 따지고 보면 뮤지컬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따라간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뮤지컬 장면이 시작되면 영화 스토리가 중단되는 게 불만이었다”는 진가신은 극이 지루해질 법한 순간에 춤과 노래로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와 극중 뮤지컬에 별도의 생명과 소임을 불어넣어, 끊임없이 서로를 돋우고 영향을 주고받도록 구성했다. 지난 사랑에 대해, 지금의 사랑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놓는 법이 없는 주인공들은 뮤지컬 속에서만큼은 감춰둔 감정을 터뜨리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을 외면하는 손나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던 지엔이 “진짜 두려운 건 그녀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손나의 과거를 알아버린 니웨가 (마치 ‘오페라의 유령’처럼) “나없이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분노를 터뜨리는 건, 현실이 아니라 극중극을 통해서다. 이처럼 뮤지컬은 알쏭달쏭한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에 대한 ‘각주’ 역할을 친절하게 수행한다. 장르나 스타일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이야기가 우선이라는 진가신의 소신이 빛을 발한 대목.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좋은 편인데, 특히 매 장면 새롭게 빛나는 주신의 매력, 금성무와 장학우의 노련한 카리스마, 다른 언어로 말하고 노래하면서도 겉돌지 않는 지진희의 선전이 돋보인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발리우드 뮤지컬 중간쯤에 자리한 춤과 노래, 곡예의 향연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건 물론이다.

<첨밀밀> <고잉 홈>의 뮤지컬 버전을 예상한 팬들에게 <퍼햅스 러브>는 기대한 것과는 다른 영화로 비칠 수도 있다. 운명의 장난, 엇갈리는 사랑으로, 멜로영화가 허하는 최대치의 ‘스릴’을 선사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현재와 과거와 극중극을 바쁘게 오가는 <퍼햅스 러브>의 감정과 사건의 밀도는 약한 편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는 거야’라는 식의 낭만주의도, 더이상은 고수하지 않는다. 손나와 지엔이 함께했던 그 겨울의 빙판은, 그들의 견고한 우주였고 생명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이 위안을 구하는 풀장은, 제대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될, 불안정한 현실이다. 진가신이 스스로 밝혔듯, <퍼햅스 러브>는 이처럼 ‘현실적인’ 혹은 ‘성숙한’ 멜로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사랑도 변한다는, 나이든 이의 성찰이 담긴 멜로다.

<퍼햅스 러브>의 놀라운 힘은 영화를 보는 이가 사적으로, 감성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인생을 영화에 비유하는 이 영화는 자신의 지나온 인생 몇권을 통째로 ‘리와인드’하게 만드는 그런 멜로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추억을 가위질하는 우를 범하고 있진 않은지, 소중한 사람의 인생에서 편집당하지 않을 가치를 스스로 지켜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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