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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가 야수를 죽일 수 있던 이유, <킹콩>

잃어버린 애완동물에 대한 추억 상기시키는 <킹콩>

당대 관객에게 던진 시각적 충격이라는 점에선 피터 잭슨의 <킹콩>이, 그가 경배를 바치려 한 72년 전의 오리지널 <킹콩>에 미치긴 힘들 것이다. 9·11 이후의 영화적 구경거리가 진정으로 충격적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1933년의 <킹콩>은 당대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 경지를 돌파한 것이었다.

잭슨의 <킹콩>이 선사하는 스펙터클은 그의 전작 <반지의 제왕>에서 빚어낸 신화적 자연, 초인간적 문명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에 비해서도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대도시의 한가운데 등장한 괴수라는 오래된 영화적 소재는, 외계인이 지구를 초토화하는 스펙터클마저 진부화한 마당에 이젠 거의 귀여워 보인다. 이런저런 사정이 이 리메이크작의 정서적 힘을 멜로드라마에서 구한 이유일 것이다.

어쨌거나 피터 잭슨의 꿈은 이뤄졌다. 유년기를 사로잡은 환상을 자신의 손으로 재창조하는 건, 더구나 거의 천문학적 돈이 들어가는 영화로 그 꿈을 이룬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행복이다. 설령 이 영화로 돈을 전혀 벌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영화광 출신 감독이 누릴 수 있는 귀중한 행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게 <킹콩>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킹콩, 반영웅의 동물버전

주인공이 감독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영화를 다른 의미에서 진지한 것, 예컨대 영화의 재현에 관한 영화적 진술로 바라보고픈 유혹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덴햄(잭 블랙)이라는 인물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자연 다큐멘터리스트나 탐험가에 가까우며(그는 정글영화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가 선택하는 것이, 필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영화가 아니라 실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보는 건 과장이다. 쇼비즈니스에 관한 몇 가지 풍자 역시 새롭거나 신랄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이 영화에 관해선 잡담을 좀 해도 될 것 같다. 잡담의 주제는 ‘야수는 왜 미녀에게 매혹되는가’이다.

미녀가 야수에게 매혹되는 과정은 명료하다. 잭슨의 <킹콩>은 감동적인 멜로드라마다. 그 감동의 실체는 킹콩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동정이다.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고, 여인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야수는 미녀를 사랑해선 안 된다. 동화 <미녀와 야수>에선 미녀의 사랑이 (실은 인간인) 야수를 인간으로 탈바꿈(실은 환원)시키지만 이 이야기에선 야수가 야수의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는 인간세계 밖에 영원히 머물거나 그 안으로 들어온 이상 사멸해야 한다. 앤(나오미 왓츠)이 바닷가에서, 그리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사멸해가는 그의 운명을 목격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것은 의인화된 킹콩의 캐릭터를 향한 동정이면서, 동시에 인간 문명의 가혹한 처단의 역사에 관한 비탄이다. 혹은 문명의 자연에 대한 죄의식과 향수 같다. 그러므로 <킹콩>이란 영화는 새롭진 않더라도 더없이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주 특별한 관객이 아니라면 앤이 킹콩에게 매혹되는 과정에 공감할 것이다. 사람을 장난처럼 입에 물고 다니던 잔인하고 못생긴 오리지널 킹콩과는 달리 새 킹콩은 외모도 훨씬 향상됐고 표정도 풍부해졌으며,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물론 아주 용맹하고 강하다. 그가 티렉스 3마리와 K-1 선수 같은 테크닉으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 중 하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앤을 구한 뒤에 짐짓 딴청을 피우는 여유와 애교도 지니고 있다. 석양을 고요한 자태로 바라볼 때는 거의 인간적 기품까지 느껴진다. 그는 반영웅의 동물 버전이다.

야수는 왜 미녀에게 매혹되는가

그러나 뒤집어서 물어보자. 킹콩은 왜 앤에게 매혹되는가. 오리지널 <킹콩>에서 그 대답은 영화의 서두에 계시처럼 주어진다. “예언자가 말하기를, 야수가 미녀를 쳐다본다. 그의 잔인한 손은 얼어붙었고, 그날 이후 야수는 얼이 빠진 자처럼 되었다.” ― 고대 아라비아 속담. 야수는 미녀에게 매혹돼야 할 운명이며, 오리지널에선 킹콩의 감정에 대해 별다른 묘사를 덧붙이지 않는다. 미녀도 별다른 매력이 없다.

새 <킹콩>은 훨씬 친절하다. 21세기의 앤은 72년 전의 앤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나오미 왓츠가 오리지널의 앤 역을 맡은 페이 레이(극중의 감독 잭 블랙이 캐스팅하려 했으나 “페이는 RKO에서 쿠퍼의 영화― 그 영화가 바로 1933년의 <킹콩>이다― 를 찍고 있다”고 조감독이 답하는 장면을 통해 피터 잭슨이 유머러스하게 경의를 표한)보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더 우아하고 기품있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밀림에서 고생도 훨씬 더 많이 하며, 그만큼 육체의 노출도 더 많다(스톱모션 기법으로 촬영된 오리지널 버전에선 여배우의 육체를 드러낼 수 있는 근접 촬영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성적 매력도 더 강하다.

피터 잭슨이 앤의 매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대는 것 중의 하나는 금발 미녀의 신화다. 아드리앙 공보의 말대로 금발은 전 지구적으로 승리한 존재다. 오리지널 <킹콩>에서도 섬의 원주민들이 앤을 보자마자 원주민 여인 6명과 바꾸자고 제안한다. 킹콩이 원주민 처녀 6명보다 금발 미녀 한명을 더 좋아할 걸로 가정하는 것이다. 금발 미녀는 자연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우월한 존재인 것이다(이를 서양 중심주의적으로만 보는 것은 금발의 실재하는 시각적 매혹을 간과하는 것이다. 서양 여인들도 모두 금발이 되고 싶어한다). 더욱이 흑백영화였던 오리지널 <킹콩>에선 힘들었겠지만, 잭슨의 <킹콩>은 아프로디테의 현신인 금발 미녀를 마음껏 찬미한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두 장면은 모두 황혼녘이다. 첫 장면은 킹콩이 앤을 구한 뒤 자신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황금빛으로 가득하다(여기서 둘의 성적 접촉이 처음 이뤄진다). 두 번째는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갔을 때로, 역시 세상은 지는 해의 눈부신 잔광에 물들어 있다. 두 장면 모두에서 물기가 번진 앤의 눈은 사랑으로 충만하다. 황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세상의 중심 혹은 정상에서 금발 미녀는 완벽한 사랑과 미의 여신이 된다.

게다가 영화의 초반부에 앤은 극단에서 쫓겨난 뒤 사과를 훔쳐서 허기를 달래야 하는 가련한 존재로, 결국 나체 공연을 권유받는 신세로까지 전락한다. 인간사회는 그녀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부당하게 학대한 것이다.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세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끄는 건 킹콩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온전한 여신의 모습을 되찾는다. 앤이 다소 경박하게 묘사된 오리지널 <킹콩>에 비하면 잭슨의 <킹콩>은 킹콩이 아니라 앤의 영화처럼 보인다(킹콩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오리지널 <킹콩>의 카메라는 여자쪽에서 킹콩을 보지만, 잭슨의 <킹콩>은 킹콩쪽에서 여자를 본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애완동물의 신화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매혹되는 건 우리 같은 관객, 즉 같은 종의 동물인 인간들이다. 킹콩이 자기 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다른 종의 동물에게 성적으로 매혹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작은 그리고 실은 그에겐 매우 기괴하게 보일 동물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건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된다. 야수는 미녀에게 매혹될 수 없다. 혹은 야수와 미녀의 성적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결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걸까. <킹콩>의 명백한 거짓말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애완동물 신화가 변형 투사되어 있다.

여기엔 존 버거가 쓴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에서의 논의가 유용할 것 같다. 애완동물 신화는 “애완동물 소유자는 자기의 애완동물에게 그 밖의 누구와도, 세상의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존재가 된다”고 설정한다. 그러나 그 관계의 형성은 애완동물이 물질적 생존 조건을 자신의 소유자에게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동물의 자율성은 부정되며, 애완동물에게만 특별한 존재인 한 그 소유자의 자율성도 상실된다. “애완동물은 그(소유자)에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되었을, 성격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반응을 제공함으로써 그(소유자)를 완성시킨다.”

킹콩과 앤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정글에서 앤은 명백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킹콩의 애완동물이다. 실제로 킹콩은 앤을 애완동물처럼 다룬다. 그동안 자신에게 바쳐진 원주민 여성은 음식이었지만, 앤은 식용으로 대하지 않으며 그녀를 희롱한다(오리지널 <킹콩>에선 킹콩이 앤의 옷을 벗겨내는 노골적인 장면도 있다. 여러 면에서 오리지널은 호러 장르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완동물이 그 소유자를 길들이려고 시도한다.

첫 황혼 장면에서 앤은 킹콩에게 인간의 단어를 가르친다. 그 단어는 ‘아름답다’이다. 앤은 정글에 대해 어떤 것도 익히지 않은 채, 정글에선 전혀 필요없는 인간 언어, 그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지 않은 단어를 자신의 소유자이자 정글의 왕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 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역할 전도의 시도는 애완동물 신화의 무의식이 낳은 관성이다.

개별자로서의 동물은 언제나 ‘나를 향해’ 그곳에 있으며, 그것은 이미 그 ‘동물’이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을 때 확증된 것이다.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이 관성은 이 영화의 다분히 관습적인 원시부족 묘사보다 더 중요한 측면이다. 이 기묘한 전도의 시도는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죽기 직전 그 단어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의해서 성공한다. 애완동물로서의 자격이 가까스로 완성되자 그는 죽는 것이다.

<킹콩>을 야생의 순수, 원시적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바라보는 건 오해다. <킹콩>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연이 아니라 잃어버린 애완동물의 추억에 관한 영화다(피터 잭슨에게 킹콩은 가상의 애완동물이기도 했다). 그 동물이 있어 내가 완성됐지만 이젠 내 곁에 그가 없는 것이다. 이 영화가 부인하는 건 동물의 침묵하는 눈이다.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면 무지와 공포를 건너 인간을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이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특별한 시선을 갖지 않으며 인간을 어떤 다른 동물을 볼 때와 마찬가지의 조심스러움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이야말로 인간이 동물을 우리에 가두거나 애완동물로 삼음으로써, 잃어버린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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