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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핑계가 중요하다, <브로큰 플라워>

투덜양, <브로큰 플라워>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태도를 배우다

2006년의 태양이 저만치 중천에 올랐고 개띠해를 맞이해 개같이 살자(좋은 말이다, 충직, 정직 이런 거)는 구호가 여기저기서 메아리치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브로큰 플라워>가 좋다. 비문임에도 이렇게 쓴 이유는 <브로큰 플라워>가 새해가 돼도 여전히 게으른 나의 태도와 무계획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영화 같아서다.

내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알리바이라고 보는 이유는 <브로큰 플라워>가 ‘엎어치나 메치나 흐르는 게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로 보였기 때문이다. 뭐 새삼스런 진리도 아니지만 이 영화처럼 너저분한 부연설명없이 이 만고의 진실을 말해주는 영화는 못 본 것 같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뿐이다.” 자주 인용되는 영화의 이 대사는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식의 계도성 코멘트가 아니다. 사실 현재란 건 없다. 돈 존스턴이 ‘어쩌면 아들’에게 이 말을 하고 나면 이 말은 과거가 되고 그에 대해 아직 나오지 않은 응답은 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돈 존스턴식으로 인생을 말하면 산다는 건 미래를 과거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인생은 나그네길식의 허무주의 해석조차도 필요없는 게 인생이다.

돈은 왜 여행을 떠났을까. 처음에 나는 그게 궁금했다. 애인이 떠나도 소파를 뜨지 않던 그가 갑작스런 아들 타령에 직접 확인하지도 않은 아들의 엄마를 찾아 떠난다는 게 웃기지 않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찾아와도 “나 그때 콘돔 썼다”고 한마디하면, 아니 빌 머레이의 그 무표정으로 한 10분만 현관 앞에 버티고 서도 자연히 해결될 일 아닌가.

미스터리한 편지뿐 아니라 친구 윈스턴의 독려도 핑계일 뿐이다. 그런데 그 핑계가 중요하다. 그는 핑곗거리를 찾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의 신발끈을 조이게 하는 건 거창한 명분이나 이상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그저 사소한 핑곗거리가 아닐까. 돈이 아무리 카우치 포테이토지만 소파에 누워 있다 죽는 인생은 너무 지루하지 않나. 그렇다면 핑곗거리를 찾을 수밖에.

돈의 여행은 예측대로 진행된다. 옛날 여자들은 돈을 기억하고 때로는 섹스로 환대받기도 했지만 그래봤자 지금 그녀들은 돈 존스턴을 돈 존슨이라고 알아듣는 꽃집 아가씨와 별 다를 게 없다(그가 만나는 여자 중에 가장 따뜻한 목소리를 건넸던 건 바로 꽃집 아가씨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추억의 단서’들은 시든 꽃처럼 후줄근할 뿐이고 자신의 이름을 되뇌면서 찌질한 배우 돈 존슨을 떠올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엄쳐가야 하는 게 그의 여행이고 현재다.

새해계획 따위 웅대하게 세워도 네 이름을 김은형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김은영이나 심지어 김음형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며 네 인생에 필요한 건 작은 핑곗거리라고 <브로큰 플라워>는 내게 속삭여준다. 그래서 나는 올해도 내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살고자 한다. 너무 원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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