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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겨운 촘스키
정희진(대학 강사) 2006-01-20

“페미니스트도 남자한테 꽃다발 받으면 기분 좋아요?”, “선생님 말이 잘 안 들려요”. 여성학 강의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과 불만 사항이다. 일상 대화와는 달리 나는 강의, 특히 대학 수업에서는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적으로 말한다. 목소리도 큰 편이다. 사람들이 “안 들린다”고 호소하는 이유는 두 가지. 내가 최대한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사회운동이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라기보다는,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안 깨지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라는 식이다. 기존의 전제 자체를 질문하는 이런 식의 말하기는 듣는 사람에게 노동을 요구한다.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당연히 잘 들리지 않는다. 두 번째 이유가 오늘의 본론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 지식인, 흑인 지식인, 동남아시아 지식인은 ‘어색한’ 존재다. 말하는 사람의 몸은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평가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 백인들은, 원어민이라도 아시아인의 외모라면 그/그녀의 영어를 의심하며, 내 학생들처럼 “잘 안 들린다”고 ‘호소’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진보’ 언론의 신년 인터뷰에는 ‘세계 최고 지성’이라는 노엄 촘스키가 등장했다. ‘보수’ 언론에는 폴 케네디, 로버트 코헨 같은 이들의 ‘한 말씀’이 실린다. 그들로부터 세계 정세, 심지어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나아갈 길’에 대해 듣는다. 백인 남성이 전세계 지식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간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전으로 삼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적 식민주의의 반영이다. ‘진보 인사’ 촘스키가 ‘의식화’해야 할 주요 대상은, 미국의 보수 우익 대중이지 그들로부터 피해받는 한국이 아니다. ‘세계적 석학’을 불러놓고 “한국 노동운동의 방향을 말해달라”, “한국 여성운동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지식인, 사회운동가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면 ‘석학’들께서는 “당신이 답해야 할 문제를 왜 나한테 물어보나?”고 말하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다.

나 역시 그다지 탈식민화된 인간은 아니다. 연말에 모 여성단체가 주최한 학술 모임에 갔다. 질문과 토론시간이 너무 짧고 전체적으로 일방적인 분위기여서 말들이 많았다. 쉬는 시간에 여성들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토론자로 초청된 남성이 “토론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억압적이다”라고 지적하자, 그제야 청중석이 술렁이면서 여성들은 ‘안심’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내가(여성이) 문제 제기했으면 욕먹었을 것”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훌륭한 남성’이 여성주의를 여성에게 ‘지도’하는 모습. 마치 미국에 저항하기 위한 지식도 미국인에게 배우고, 서울 중심주의가 왜 문제인가를 서울 사람을 불러 강의를 듣듯 말이다. 이러한 현실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는 나도, 얼마 전 레즈비언 친구가 영화 <양들의 침묵>의 레즈비언 코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과잉 해석”이라고 일축했다가, 친구와 같은 의견을 주장한 영어 문헌을 읽고서야 “그렇군!” 깨달은 적이 있다(친구에게 사과했고, 엄청 비판받았다).

여성이 여성의 말보다 남성의 말을, ‘비서구인’이 자신보다 서구인이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신뢰하며, 동료보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 이것이 식민성이다. 이렇게 ‘본국’을 ‘열망’하는 모습은 여성운동가,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입장은 숭미(崇美), 반미(反美), 용미(用美) 등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내가 들은 어처구니없는 말은 독미(讀美)였다. 미국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김은실의 지적대로, 미국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세계”로 보고 ‘우리’상황을 미국과의 관계로부터 설명하는, 미국을 유일한 참고문헌으로 삼는 발상. 우리 사회의 광적인 미국 혹은 일본에 대한 관심(비판, 숭배…)은 ‘전문가’부터 ‘일반 대중’까지 차이가 없지만, 사실 미국이나 일본은 한국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왜 그토록 자발적으로 그들의 지식 시장, 청중이 되려고 하는가. 내년부터는‘백인 남자 어른’의 ‘한 말씀’을 좀 덜 들었으면 한다.

사족. 이 글 첫 문장에 대해 나는 대개 이렇게 답한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요. 그 페미니스트가 레즈비언이라면 무심하거나 곤란할 테고, 시상식장에서라면 기쁘겠죠. 이성애 관계라도 남자가 폭력과 거짓말을 일삼은 뒤에 가져오는 꽃다발이라면 문제죠. 받고 싶은 상황에서 받고 싶은 사람에게 받는다면 누구나 너무 좋겠죠!”

일러스트레이션 김순겸